728x90 우리 역사/근현대사180 신문의 시초 독립신문 《독립신문》은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며 관리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라고 알려주었다. 관존민비의 봉건적인 전제군주 치하에 억눌려 살던 국민들로서는 처음으로 깨닫는 새로운 사실이었다. 독자들은 이 신문에 실린 사설과 기사를 통해 국가의 안위가 위태로웠던 당시의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치가 어떠한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열강 여러 나라들이 국가의 이권을 탈취한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저항하여 국가의 이익을 수호하도록 했다. 《독립신문》은 한글을 전용하여 누구나 읽기 쉽도록 만들었다.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한 한글 전용의 신문을 제작하여 한글을 일상적인 공용문자로 격상시켰으며, 그 후에 창간되는 한말의 다른 민간 신문이 한글을 사용하게 된 것도 독립신문의 선구적인 한.. 2015. 6. 30. 광복후 신문 1948년에 수립된 대한민국 정부는 공산당을 불법화하고 이에 대한 찬양과 지지를 단속하는 일환으로 좌익신문을 탄압했다. 정부의 이러한 언론정책이 계속됨에 따라 열세에 놓여 있던 우익신문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으며, 신문이 안정기로 접어들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중앙의 각 신문사는 전시판 신문을 발행했고, 휴전 후 각 신문사는 다시 서울로 돌아와 본격적으로 신문을 발행했다. 이후 각 신문의 논조는 저마다 특색을 띠게 되었으며, 그중에서도 〈동아일보〉·〈경향신문〉 등이 이승만 독재체제 비판에 앞장섰다. 정부는 여러 차례 언론자유를 억압하는 법안을 마련하려고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신문은 일치단결하여 언론자유와 민권옹호를 부르짖고 장기집권체제에 날카롭게 맞섰다 2015. 6. 22. 동아일보 〈동아일보〉는 김성수(金性洙)·송진우(宋鎭禹) 등이 내건 언론·교육을 통한 민족의식 고취사상과 〈매일신보〉 편집장 이상협(李相協), 〈평양일일신문〉의 주간 장덕준(張德俊), 오사카[大阪] 〈아사히 신문 朝日新聞〉 기자 진학문(秦學文) 등이 추진한 민간신문 창간운동을 계기로 전국 412명 주주들에게서 주식을 공모하여 주식회사로 출발했다. 자본금 100만 엔을 목표로 사업에 착수하여 1919년 10월에 〈동아일보〉라는 제호를 결정한 후 1920년 1월 4일부로 총독부의 허가증을 받았다. 김성수·박영효·장덕준 등 발기인 77명을 주축으로 주식을 공모해, 제1회 불입이 끝나기 전에 신문을 발간했다. 주식회사 발기인 대표 김성수, 사장 박영효, 편집감독에 양기탁(梁起鐸)·유근(柳瑾), 주간 장덕수(張德秀), 편집.. 2015. 6. 19. 자유기(1960~61) 1960년 3월 15일에 실시된 대통령 선거의 부정을 규탄하는 데모가 전국적으로 일어나 자유당 정권이 마침내 무너졌다. 신문이 4·19혁명에 끼친 영향은 매우 컸다. 대부분의 신문들은 이승만 정권의 부정부패를 폭로하고 민권을 수호하기 위해 줄기차게 투쟁했다. 4·19혁명의 와중에 친여계인 서울신문사가 데모대에 의해 소각되었으며, 이 의거의 성과로 〈경향신문〉은 정간 361일 만에 복간되었다. 1960년 7월 1일에는 '신문 및 정당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을 공포하여 정기간행물의 허가제를 등록제로 바꾸었다. 그 결과 각종 정기간행물이 쏟아져나오고 사상면에서 정부 수립 이후 어느 때보다도 자유를 누릴 수 있었으나, 사이비 기자가 횡행하는 등의 부작용도 나타났다. 이 시기는 한국 신문 역사상 과거의 어느 때.. 2015. 6. 19. 이전 1 ··· 40 41 42 43 44 45 다음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