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신문》은 국민의 권리와 의무가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었다.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며 관리는 국민을 위해 봉사하는 존재라고 알려주었다.
관존민비의 봉건적인 전제군주 치하에 억눌려 살던 국민들로서는 처음으로 깨닫는 새로운 사실이었다.
독자들은 이 신문에 실린 사설과 기사를 통해 국가의 안위가 위태로웠던 당시의 국제사회에서 한국의 위치가 어떠한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열강 여러 나라들이 국가의 이권을 탈취한다는 사실을 폭로하고 저항하여 국가의 이익을 수호하도록 했다.
《독립신문》은 한글을 전용하여 누구나 읽기 쉽도록 만들었다. 배우기 쉽고 쓰기 편한 한글 전용의 신문을 제작하여 한글을 일상적인 공용문자로 격상시켰으며, 그 후에 창간되는 한말의 다른 민간 신문이 한글을 사용하게 된 것도 독립신문의 선구적인 한글 전용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신문의 교보원(校補員 : 오늘의 편집기자 겸 교열기자)이었던 주시경은 신문사 안에 국문동식회(國文同式會 : 한글 연구를 목적으로 만든 최초의 국어연구회)를 만들어 국어연구에 전념하기 시작했고, 이 신문은 정부와 국민들이 한글을 공용문자로 사용할 수 있는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독립신문》은 구독료를 싸게 하여 상하귀천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했다. 1897년 1월부터는 한글판과 영문판을 분리하면서 한글판은 동전 2푼(2전), 월 25전, 연 2원 60전을 받는 반면에, 영문판은 1장당 동전 5푼(5전), 월 75전, 연 6원으로 올렸다.
영문판의 구독료를 한글판보다 2배 이상 3배씩이나 비싸게 책정한 것은 경제사정이 어려운 한국인들에게 신문 구독의 경제적 부담을 덜어주어 많은 사람이 읽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독립신문》은 광고의 중요성을 입증했다. 《한성주보》에는 몇 건의 광고가 등장했으나 광고료를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독립신문》은 광고를 게재하여
신문 경영에 중요한 수입원으로 삼아서
신문이 독립 사업으로 운영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창간되는 민간 신문에서 이와 같은
경영방법을 채택했다.
독립신문 이후에 여러 민간 신문이 나타나게 된 것도 구독료와 광고료만으로 외부의 보조 없이 신문을 운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