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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근현대사180

간도 참변 1920년 6월과 1920년 10월의 봉오동, 청산리 전투에서 큰 타격을 입은 일제는 독립군의 항전을 자기들의 식민통치에 대한 위협이라고 판단하고, 만주에 있는 한국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완전 소탕하기로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보복은 1920년 10월부터 1921년 4월까지 계속되었는데, 한인 촌락에 대한 무자비한 초토화가 전개되어 한인들을 무차별하게 살해하고 가옥, 교회, 학교 등도 불태워 우리나라 독립군의 기반 자체를 완전히 파괴하고자 하였다. 1920년 10월과 11월 두 달 사이에만 약 3,600여 명이 학살당하였고, 150여 명이 검거되었다. 또한 가옥 3,500여 채, 학교 60여 개소, 교회 20여 개소 및 양곡 6만여 석이 소각되었다고 전해진다. 간도참변은 만주에서 선교 활동을 하던 서양인 .. 2015. 8. 3.
근우회 1919년 3·1운동 직후에 조직되어 활약한 대부분의 항일여성단체들이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었다. 이후 여성운동은 교육운동, 민족경제진흥운동, 종교계 여성단체를 통한 신앙운동이나 생활향상 계몽운동으로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여성운동이 1924년 사회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아 조선여성동우회가 조직된 뒤부터는 민족주의적 방향과 사회주의적 방향으로 양분되었다. 분열된 국내외의 항일민족운동을 통합해 보다 강력한 민족운동으로 추진하기 위해 1927년 2월신간회(新幹會)가 조직되었다. 여성계에서도 여성운동의 통합론이 일어나, 마침내 그 해 5월에 근우회가 조직되었다. 창립 취지는 “과거의 여성운동은 분산적이었으므로 통일된 조직도 없고, 통일된 목표나 지도정신도 없어 충분한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으므로, 여성 전체의 역.. 2015. 7. 30.
스크랜톤 대부인의 외아들 윌리엄 스크랜턴이 설립한 정동병원은 제중원에 이어 두 번째 병원이었다. 1887년 고종 임금은 정동병원에 “施病院”이라는 이름을 하사했다. 1890년에는 현 남대문시장 상동교회 자리에 상동병원을 설립했다. 그 후 거주지와 활동지를 상동으로 옮겨, 상동교회를 설립했다. 스크랜톤 대부인의 외아들 윌리암 B. 스크랜톤선교사는 1856년 5월 29일 미국 코네티컷 뉴해븐에서 출생하여 예일대학(1878)과 뉴욕 의과대학(1882)을 졸업했다. 루리 W. 암스(Loulie Wyeth. Arms)와 결혼하여, 1882년부터 1884년까지 오하이오주에서 개업의사로 활동하였다. 1884년 미국 감리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목사 안수를 받고 1885년 5월 3일 한국 선교를 위해 입국했다. 윌리엄 스크랜튼은 주로 의료선교에 .. 2015. 7. 24.
스크랜턴 모자의 복귀 윌리엄 스크랜턴이 1903년 3월 선교사직 사임 의사를 밝혔을 때 한국교회와 사회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당시 떠도는 민간 속담에는 ‘신축년에 남편 찾기’란 말이 있었다. 불가능한 것을 해보려고 쓸데없이 애쓰는 것을 빗댄 말이었다. 신축년이었던 1901년은 흉년과 기근이 전국을 휩쓸어 수많은 사람이 죽고 가정이 파괴됐다. 신축년 재앙은 경제, 사회적 위기를 초래해 하와이 노동이민이 추진됐고 감리교의 경우 서부지방 장로사였던 존스 선교사가 이에 적극 가담했다. 인천과 강화, 황해도 지방 교인들이 대거 하와이 이민 행렬에 합류했다. 한국 감리교회는 스크랜턴과 아펜젤러의 부재로 상실감과 위기감을 느꼈다. 설상가상으로 감회사 직책을 수행하던 존스 부부도 1903년 5월 휴가를 얻어 한국을 떠났다. 출국 당시 건강.. 2015.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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