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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근현대사

스크랜턴 모자의 복귀

by 산골지기 2015.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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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스크랜턴이 1903년 3월 선교사직 사임 의사를 밝혔을 때 한국교회와 사회 상황은 악화일로였다. 당시 떠도는 민간 속담에는 ‘신축년에 남편 찾기’란 말이 있었다. 불가능한 것을 해보려고 쓸데없이 애쓰는 것을 빗댄 말이었다.

 

 신축년이었던 1901년은 흉년과 기근이 전국을 휩쓸어 수많은 사람이 죽고 가정이 파괴됐다.

 

 

신축년 재앙은 경제, 사회적 위기를 초래해 하와이 노동이민이 추진됐고 감리교의 경우 서부지방 장로사였던 존스 선교사가 이에 적극 가담했다.

 

인천과 강화, 황해도 지방 교인들이 대거 하와이 이민 행렬에 합류했다. 한국 감리교회는 스크랜턴과 아펜젤러의 부재로 상실감과 위기감을 느꼈다.

 

 설상가상으로 감회사 직책을 수행하던 존스 부부도 1903년 5월 휴가를 얻어 한국을 떠났다. 출국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았던 그는 사임 의사를 밝혔다. 미국 선교본부는 스크랜턴에 이어 존스까지 사임을 표하자 크게 당황했다.



그런 가운데 스크랜턴이 한국 복귀 의사를 밝혔다. 1903년 11월 말이었다. 사임의사를 번복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는다. 다만 두 달 전인 9월, 그를 찾은 존스 선교사와 나눈 30시간의 대화가 동기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당시 만남에서 스크랜턴은 존스에게 사임을 만류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크랜턴은 대화 후 선교본부에 편지를 보내고 존스를 계속 선교사로 붙들어 두라고 조언했다.

 

결국 존스는 3년 후 정동교회 담임으로 파송을 받으며 복귀했다. 어쨌든 스크랜턴은 존스와의 대화 속에서 개척자들이 모두 떠난 한국교회의 위기 상황에 자신들도 책임이 있음을 느꼈던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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