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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근현대사180

일본에서의 의거활동 의열단의 의거 활동은 해외에서도 이루어졌는데 1924년에 김지섭은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인 왕궁에 폭탄을 던지는 거사를 감행했다. 1922년 중국 상해에서 의열단에 입단한 김지섭은 1922년 1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였고 이후 국민대표대회에도 참석하였다. 일본에서 관동대지진가 일어나 한국인 학살이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보복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일본으로 갔다. 1924년 초 일본 동경에서 제국의회가 열려 일본의 총리대신을 비롯해 여러 대신들과 조선총독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복의 기회로 삼으며 동경에 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동경으로 가던 중, 제국의회가 휴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계획을 바꾸어 침략의 아성인 일본 궁성에 투탄하기로 결정하였다. 1월에 황성 정문에 접근하여 호위경관이.. 2016. 1. 15.
박서양--- 최초의 양의사 한국인 최초의 양의사인 박서양은 당시의 백정이라는 천한 신분으로 제중원 의학교를 졸업하여 의사가 된 인물이다. 최하층 신분이었던 박서양이 의사가 된 것은 제중원 4대 원장인 에비슨과의 운명적 인연 덕분이었다. 에비슨은 처음 박서양의 제중원 의학교 입학을 허락하지 않은 대신 그를 병원으로 불러 청소, 침대 정리 등 온갖 궂은일을시켰다. 뒷날 밝혀진 일이지만 에비슨은 박서양의 사람됨을 알기 위해 일부러 그를 시험한 것이었다. 2016. 1. 8.
미국함대의 강화도 침입 미국의 아시아 함대는 일본 나가사키에 집결하여 약 보름 동안 실전에 못지않은 해상 기동 훈련을 실시하었다. 마침내 주청 전권 공사 로우와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는 기함 콜로라도호를 포함하여 85문의 대포가 탑재된 군함 5척, 해군과 육전대원 총 1,230명을 이끌고 조선으로 출발하였다남양만에 도착한 미군은 뱃길을 탐사하면서 강화 해협 쪽으로 북상, 물류도(勿溜島)를 모함의 정박지로 정한 다음 조선에 해안을 탐측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고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포함 2척과 기정 4척으로 구성된 미군의 탐측대는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 해협 수로를 측량, 정찰하기 위해 해협을 거슬러 올라갔다. 탐측대가 손돌목 포대 부근에 도달했을 때 포탄이 빗발치듯 날아왔다. 미군은 갑작스런 공격에 당황했지만 조선 측 대포의 .. 2016. 1. 7.
포항대송교회(1901년 창립) 포항대송교회는 1901년 포항에 최초로 세워진 교회이다. 19세기말 정치인들의 부정부패로 인하여 동학란이 일어나고 당파싸움이 벌어지고 친일파, 친러파로 갈리어 나라가 어지러울 때 이곳 동해바다 영일만 대송면 넓은 들, 그리 크지 않는 괴동 마을에 살던 박군현氏는 청운의 뜻을 품고 바다 건너 일본에 가서 머무는 동안 그리스도 복음을 접하며 일본 젊은이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고 그 원동력이 어디에 있는가 관찰한 결과 일본이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그 문화가 정착 된데 있다는 것을 깨닫고 복음의 씨앗을 고국으로 가져와 자기 집 사랑채를 예배당으로 예배 드리기 시작한 것이 1901년 대송교회 전신인 괴동교회의 출발이었다. 당시 일반적인 교회역사는 선교사에 의해 교회가 세워진 시대 이었으나 대송교회는 이 지역인.. 2015.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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