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우리 역사/근현대사180 육영학원 고종은 육영공원의 관심이 지대하여 개교 후 얼마 안되어 직접 시험의 시행자가 되어 영어과목의 시험을 주관하였다. 초기에는 의무적으로 기숙사 생활을 하였으나, 곧 너도나도 개인행동을 하였다. 육영학원에서는 무료로 침식을 제공하였고, 책도 물론 무료였다. 더구나 매달 담뱃값 명목으로 6원(600전)씩 지급하였다. 학생들은 모두 갓을 쓰고 도포를 입었으며, 심지어 가마로 등교하는 학생도 있었다. 책과 담뱃대는 하인이 들고 다녔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늘 불평이었다. 규칙이 너무 까다롭다는 이유였다. 신학문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다. 절반이 현직 관리인 육영공원 학생들은 신학문에 대한 관심과 열망이 적었고, 그들은 글공부가 출세와 직결한다는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급기야 학생들이 요청하면 수업시간도 단축.. 2016. 2. 12. 나운영 1952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작곡 --- 기독교 찬송가를 1,105곡 작곡하였으며, 1955년‘바이올린을 위한 산조’에서 한국적 표현을 구체화 나운영은 1939년 동아일보의 신춘문예 작곡부문에 응모했고 1등으로 당선 되었다. 작곡부문의 심사위원장은 홍난파. 신춘문예에 작곡부문이 들어간 것은 그때가 유일하다. 이후 는 김억이 1925년에 펴낸 창작시집 에 실렸다. [가려나]는 사랑하는 이가 떠나려는 것을 바라만 볼 수 밖에 없는 안타까운 심정, 그리고 젊은 날의 기쁨과 설움, 앞날에 대한 기대와 걱정을 잘 표현하고 있는 아름다운 시이다. 1974년--- 미국 포틀랜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 획득 나운영은 국악을 각별히 좋아했던 아버지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음악에 관심이 있었다. 일제 식민지하에서 .. 2016. 2. 11. 버티느냐 죽느냐 8월 20일, 대구 북방의 방어선을 뚫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때문인지 유학산 일대에 포진해 있던 북한 15사단이 돌연 영천 방면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북한군 3사단과 13사단이 대구 북방에 여전히 남아 공세를 지속했지만, 8월 중순 때만큼 기세를 올리지는 못했습니다. 마침내 북한군의 공격력이 약화된 것입니다. 국군으로서는 당시 다부동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였으므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8월 21일부터 국군 제1사단의 전황은 점차 호전되어 갔고, 이날 밤 다부동에서는 한국전쟁 최초로 전차전이 전개되었습니다. 다부동 계곡에서 국군과 미군, 북한군의 전차포에 의해 발사된 철갑탄이 5시간 동안이나 교차되면서 교전을 치렀습니다 마침내, 8월 22일 국군 1사단이 유학산을 탈환하였습니다. 제1사단은 주 저항.. 2016. 2. 8. 북한의 남침 2016. 2. 8. 이전 1 ··· 19 20 21 22 23 24 25 ··· 45 다음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