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우리 역사/근현대사180 해외에서 이루어진 의열단의 의거 활동 의열단의 의거 활동은 해외에서도 이루어졌는데 1924년에 김지섭은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인 왕궁에 폭탄을 던지는 거사를 감행했다. 1922년 중국 상해에서 의열단에 입단한 김지섭은 1922년 1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민족대회에 참가하였고 이후 국민대표대회에도 참석하였다. 일본에서 관동대지진가 일어나 한국인 학살이 심하다는 소식을 듣고 보복하겠다는 결의를 다지고 일본으로 갔다. 1924년 초 일본 동경에서 제국의회가 열려 일본의 총리대신을 비롯해 여러 대신들과 조선총독이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복의 기회로 삼으며 동경에 가기로 하였다. 그러나 동경으로 가던 중, 제국의회가 휴회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계획을 바꾸어 침략의 아성인 일본 궁성에 투탄하기로 결정하였다. 1월에 황성 정문에 접근하여 호위경관이.. 2016. 3. 18. 알렌과 언더우드 알렌과의 갈등이 너무 심해지자 언더우드는 선교본부에 장로교선교사로서 사임의사를 표명하는데까지 이르렀다. 이 갈등은 알렌이 고종의 특명을 받고 미국공사로 발령되어 한국을 떠남으로 일단락 된다 심한 갈등으로 고통하던 언더우드는 알렌 후임으로 부임한 헤론(Heron)을 맞이한다. 헤론은 의료선교사였던 알렌과 같이 선교회의 기획, 예산 모든 것을 단독으로 시종일관 처리해 나가려고 하였다. 이것은 영국과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적 환경에서 자랐고, 또 개척선교사로서의 여러 가지 교육, 교회건축, 성경번역등 수많은 계획을 이행하고 있었던 언더우드에게 매우 받으들이기에 힘든 상황이었다. 언더우드는 헤론의 독단적 의사결정에 반대하여 번번히 맞섰다. 전혀 해결기미가 보이지 않던 그 문제상황에서, 헤론이 질병으로 사역 중 소천.. 2016. 3. 15. 안창호--- 진실이 나라를 되찾는 길이라고 믿었던 인물 안창호는 약속을 목숨보다 소중히 생각했다. 독립운동을 하던 중국 상하이에선 동지의 어린 딸에게 “생일날에 꼭 가겠다”고 약속했다. 약속 당일 아침에 급한 전갈이 날아왔다. 일본 헌병들이 체포하려고 쫙 깔려 있으니 빨리 피신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소녀와의 약속을 어길 수 없었다. 동지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생일에 참석하고 돌아오다 일본 헌병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안창호--- 진실이 나라를 되찾는 길이라고 믿었던 인물 그는 이후 모진 감옥 생활 끝에 죽음을 맞았다. “죽더라도 거짓이 없어라. 꿈에라도 거짓말을 했거든 깨어나서 반성하라. ” 청년들에게 이렇게 외친 안창호는 그 말을 죽음으로 지켰다. 작은 약속 하나를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걸다니! 보통 사람으로선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다. 안창호가 진.. 2016. 3. 1. 광복이후이 음악 1950년대--- 우리나라 전 예술계에서‘현대성’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시기 이전의 현대 음악에 대한 논의가 주로 현대 음악 수용을 반대하는 입장이 대부분이었다면, 1950년대에는 현대 음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입장과 현대 음악 기법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이 뚜렷하게 구분되어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 현대 음악 기법 수용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진 또 다른 인물은 나운영이다. 그는‘선 토착화 후 현대화’라는 신념으로 한국적인 작품 개척을 위하여 노력하였으며, 12음 기법 등의 도입과 민속 음악을 바탕으로 한 독창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론 정립과 창작을 병행하였다. 또한 1952년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작곡한 이후 기독교 찬송가를 1,105곡 작곡하였으며, 1955년‘바이올린을 위한 산조.. 2016. 2. 15. 이전 1 ··· 18 19 20 21 22 23 24 ··· 45 다음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