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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근현대사180

헤론과 언더우드 알렌과 언더우드가 갈등을 빚은 후 알렌 후임으로 부임한 선교사는 헤론(Heron)이었다. 헤론은 의료선교사였던 알렌과 같이 선교회의 모든 것을 단독으로 처리해 나가려고 하였다. 이것은 영국과 미국의 자유민주주의적 환경에서 자랐고, 또 개척선교사로서의 여러 가지 교육, 교회건축, 성경번역등 수많은 계획을 이행하고 있었던 언더우드에게 매우 받으들이기에 힘든 상황이었다. 언더우드는 헤론과도 갈등을 빚었는데 언더우드는 헤론의 독단적 의사결정에 반대하여 맞섰다. 헤론이 질병으로 사역 중 소천하게 되자, 언더우드는 그의 장례 및 장지까지 마련하여 주었다. 서울에는 장지를 주지 않으려는 정부에 계속 탄원하여, 마침내 양화진을 선교사묘역으로 확보하였다. 2016. 5. 10.
평양 첫 번째 교회인 ‘널다리골교회’ 모펫 목사가 노방전도를 하다가 후에 회개하고 유명한 목사가 된 이기풍의 돌팔매에 맞아 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는 조선초기선교사상 잘 알려진 에피소드이다. 그는 1893년 평양에 첫 번째 교회인 ‘널다리골교회’를 세웠다. 후에 ‘장대현교회’로 개칭되어 해방후 북한이 강제로 폐쇄할 때까지 서북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했다. 그는 특히 조선인 조사들을 앞세워 평북지역에는 김관근, 평남지역에는 한석진, 황해도 지역에는 서상륜을 대표자로 임명하고 ‘팀웍’선교를 시행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제자들을 키웠다. 이 지역에 그가 직, 간접으로 세운 교회들이 수없이 많았다. 널다리골 교회 --- 장대현 교회의 모태 무엇보다도 모펫의 가장 큰 업적은 지도자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 교육에 힘 쓴 것이다. 2016. 5. 4.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 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는 최은희이다. 1924∼1931년 조선일보 기자·학예부장을 지낸 그는 1927년 근우회(槿友會) 중앙위원, 1948년 대한부인회 서울시부회장, 대한여자국민당 서울시당수(1962), 한글학회 지도지원(1971), 3·1국민회의 대표위원(1971∼1973), 3·1운동여성참가자봉사회장(1981) 등을 역임했다. 최은희 일제강점기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여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 최초의 방송아나운서를 지냄 3·1만세운동이 있기 하루 전인 2월 28일 저녁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최은희는기숙생들과 통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모두 알렸고, 여학생들은 온종일 시가를 누비고 다니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저녁 무렵 최은희는 동료 32명과 헌병에 체포되어 남산 경무 출감부로 끌려갔는데 30명.. 2016. 5. 4.
대한민국애국부인회 회장 김마리아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결성하고 회장이 되었다. 애국부인회는 군자금 모금활동을 하면서 상해임시정부와 해외에있는 독립운동가를 지원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동지의 배반으로 1919년 11월에 조직이 탄로나게 되었고 선생은 다시 체포되어 대구에서 심한 고문을 받은후 형을 선고 받았다 심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1920년 5월 다시 가석방되어 풀려난후에는 중국 상해로 건너가 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였다. 이후 선생은 1923년 미국에 유학 했는데 파크대학과 시카고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했고 안창호의 흥사단 운동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1933년 국내로 돌아온 선생은 캐나다연합교회 선교부에서 운영하는 원산 마르다윌슨신학교 교수로 활동했다. 이후 고문의 후유증으로 인한 병이 재발하면서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고 광복을 눈앞에둔 .. 2016.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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