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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근현대사180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한국기독교박물관은 매산의 목숨을 건 열정, 부인과 딸의 생명을 대가로 설립될 수 있었다. 6·25전쟁중에는 박물관의 유물이 해외로 옮겨졌다가 다시 국내로 돌아오기도 하였다. 전쟁 이후 한국기독교박물관이 남산에 재건립되었으나, 1967년 4월 매산은 박물관 유물 일체를 자신의 모교인 숭실대학교에 기증하였다. 오늘의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은 이렇게 하여 탄생하였다. 목회자와 교육가로서 많은 교회와 학교 설립에 관여했던 매산은 1954년 숭실대학 교수로 부임한 이래 1970년 타계할 때까지 한국사, 한국교회사, 고고학 등의 연구와 교육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숭실대학교 한국기독교박물관-- 김양선이 설립 기독교와 한국의 민족문화에 대한 매산의 열정으로 설립된 한국기독교박물관은 민족문화의 우수성을 밝혀주는 수.. 2016. 4. 22.
나석주---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 식산은행에 폭탄 1926년에는 나석주가 경성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다. 일찌기 간도에 간너가 뤄쯔거우의 무관학교에서 4년간 군사교육을 받고 귀국한 나석주는 황해도 겸이포에서 항일공작원으로 일했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상해임시정부에 군자금을 모금하여 보내고 대한독립단원들과 황해도 일대에서 친일파에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후 일본 경찰의 감시가 강화되자 1920년 9월에 상하이로 망명했고 1926년 톈진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입단했다. 1926년 6월에 톈진에서 유림대표 김창숙과 모의하여 동양척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파괴할 계획을 세운 후 국내로 잠입했다. 식산은행에 폭탄을 던졌으나 불발되면서 일본경찰의 추격을 받았는데 일경과 치열한 총격전을 벌이다가 총알이 떨어.. 2016. 4. 20.
성가를 통한 신-구교일치운동 나운영이 만든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를 비롯 `주께 드리네' 등 다수곡이 카톨릭성가집에 실려있을 정도다. 성가를 통해 신-구교일치운동을 펴기도 했던 그는 원래 카톨릭신자였는데 신부가 되기위해 원산(元山) 덕원신학교에 입학할 생각을 했었고 성악가인 부인 柳慶孫여사와 명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렷다. 이후 46년 개신교로 개종했다. 개종후 서울역앞 성남교회서 30년이상 교회성가대를 지휘했으며 79년이후 송파구 오금동 호산나교회에서 매달 `월례신작성가발표회'를 갖기도 했다. 52년부터 강단에 서기 시작, 이대, 연세대, 전남대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현대음악협회장, 한국민속음악박물관장, 한국동요동인회장, 한국聖音樂협회장등을 역임했다. 화성학, 대위법, 작곡법, 음악형식론 등 다수의 저서가 있고 서울시 문화상을.. 2016. 4. 16.
선교사와 학교 아펜젤러가 학교사업을 시작할 때 언더우드는 제중원과는 별도로 고아원 형태의 교육사업을 시작했다. 언더우드는 1886년5월 정동에 한옥을 구입,수리하고 1명의 학생으로 학교를 시작했다. 이 학교는 언더우드학당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 구세학당 등으로 불리다가 1905년 경신학당으로 정착,현재의 경신학교로 발전하게 됐다. 1886년5월 스크랜턴 부인은 김씨부인이라는 어느 관리의 첩을 가르치면서 이화학당을 열었다. 의료와 교육사업은 기독교 선교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후 선교사들도 지방에서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면서 선교를 시작했다. 2016.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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