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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조선218

조선시대 역사 조선시대는 고려말의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1392년에 건국이 되었는데요 이후 1910년에 한일합방이 되면서 국권을 뺴앗기기 때문에 조선은 1910년까지가 되겠습니다 1392년 --- 이성계의 조선 건국 1910년 --- 한일합방으로 조선의 국권 상실 *** 조선의 왕 순서 조선은 519년동안 존속이 되는 가운데 27명의 왕이 있었는데요 왕의 순서는 1대 태조를 비롯하여 정종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 인종 명종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경종 영조 정조 순조 헌종 철종 고종 순종의 순서 입니다 조선 519년동안 존속, 27명의 왕 재위 *** 정조 때의 통공정책 조선시대 정조 때 통공정책을 실시한 이유는 당시의 시대의 변화상황에 맞추어 자유상인의 활동을 활성화 시키기 위해서 .. 2018. 10. 1.
함경도에 6진 설치 함경도의 경우는 일찍부터 국경선 방어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본래 고려 말 쌍성총관부의 회복과 이성계의 영향력 등으로 말미암아 조선 초에 이미 두만강 유역은 상류부터 하류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국경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태종대 여진들의 잦은 약탈에 따라 방어선이 남쪽으로 후퇴한 상태였고, 방어선 역시 두만강 유역보다 아래에 구축되어 있는 실정이었다. 그런데 1432년(세종 14년) 여진족의 일족인 우디케족이 다른 여진 일족인 오도리족을 습격하여 그 추장인 동맹가첩목아를 살해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동맹가첩목아는 조선 초부터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였던 여진 추장으로, 현재 회령지방을 중심으로 근거지를 이루고 있었으며 명으로부터도 작위를 받아 건주좌위(建州左衛)의 수장으로 임명된 거물이었다. 동맹가첩목아의.. 2018. 9. 30.
4군의 설치 북방정세와 방어체제는 세종대 중반 무렵부터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선 대륙의 명나라와 친화적 관계가 공고해지게 되었고, 북원 세력의 위협도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 반면 태종대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여진과의 갈등은 지속되어 세종대에는 두 번에 걸쳐 여진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아울러 북방의 적이 여진으로 설정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의 방어 체제가 모두 국경선을 위주로 재편되게 되었다. 본래 태종대 조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여진인들은 주로 함경도의오음회, 즉 회령(會寧) 지방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가 명나라의 관직을 수여받게 되었는데, 명에서는 관직을 수여받은 여진인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하게 되었다. 건주위 설치 이후 여진인들중 상당수가 파저강 유역으로 거.. 2018. 9. 30.
홍경래의 난과 정주성 전투 홍경래의 반란군은 정주성 전투에서 크게 피하면서 정부군에게 진압이 되게 됩니다 홍경래군은 남하하는 제1관문인 안주를 공략하기 위하여 박천의 송림리(松林里)로 집결하였다. 그러나 안주에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이해우(李海愚)와 목사 조종영(趙鍾永)이 필사의 각오로 천여 명의 병사를 모아 2대로 나누어 음력 12월 29일에 송림리의 홍경래군을 공격하였으며, 곽산 군수 이영식(李永植)의 원군의 도움으로 홍경래군은 대패하여, 정주성으로 들어가 농성하게 되었다. 무자비한 관군의 약탈과 살육이 행해지는 가운데 봉기군 지휘부가 함께 행동하자고 역설하였기 때문에 정주성에는 박천·가산의 일반 농민들도 매우 많이 들어갔다. 북진군 역시 의주의 김견신(金見信)·허항(許沆)이 이끄는 의주 민병대의 반격을 받은 데다 송림 전투에서.. 2018. 9.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