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 역사/조선

4군의 설치

by 산골지기 2018. 9. 30.
728x90

 북방정세와 방어체제는 세종대 중반 무렵부터 큰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우선 대륙의 명나라와 친화적 관계가 공고해지게 되었고, 북원 세력의 위협도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 반면 태종대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여진과의 갈등은 지속되어 세종대에는 두 번에 걸쳐 여진 정벌에 나서게 되었다.

 

아울러 북방의 적이 여진으로 설정되면서 평안도와 함경도의 방어 체제가 모두 국경선을 위주로 재편되게 되었다.


본래 태종대 조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던 여진인들은 주로 함경도의오음회, 즉 회령(會寧) 지방에 거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일부가 명나라의 관직을 수여받게 되었는데, 명에서는 관직을 수여받은 여진인들을 관리하기 위하여 건주위(建州衛)를 설치하게 되었다. 건주위 설치 이후 여진인들중 상당수가 파저강 유역으로 거주지를 옮기게 되었는데, 파저강은 현재 요동성의 동가강(佟佳江)을 지칭하는 것으로 조선의 입장에서는 압록강 이북 지역에 해당하였다. 이러면서 평안도 지역에도 여진인들과의 마찰이 생길 여지를 안게 되었다.


이들 파저강 유역에 자리한 건주위 여진의 추장은 이만주였다. 1432년(세종 14년) 평안도 지역에 여진인 400여기가 침입하여 사람과 우마를 약탈해 가다가 조선군과 군사적 충돌이 발생하였다.

이는 평안도 지역에서 여진과 마찰이 생긴 첫 사례로, 이에 대해 세종은 정승들과 더불어 사태의 수습을 논의하게 되었다. 이에 세종은 이 사태를 곧 명나라에 알리기로 하였고, 이후 군사적인 대책을 논의하게 되었다. 

 
그 결과 파저강 유역의 이만주 세력을 토벌하기로 결정하고, 최윤덕(崔潤德)을 평안도절제사로 임명하여 정벌의 총 책임자로 선임하고, 이순몽(李順蒙), 최해산(崔海山), 이각(李恪), 이징석(李澄石), 김효성(金孝誠), 홍사석(洪師錫) 등을 일선 지휘관으로 임명하여 정벌에 임하게 되었다.

 

 7개의 부대로 나누어 여진 소탕에 임한 조선군은 62명을 사로잡고 98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이만주를 사로잡는 것은 실패하였다. 이로서 조선은 여진의 약탈에 대해 강경히 대응할 것을 대내외에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후에도 여진의 약탈이 계속되자 1437년(세종 19년) 이천(李蕆)을 평안도도절제사로 임명하여 다시 한번 이만주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2차 토벌에는 동원된 병력이 총 8,000에 불과하였으나 여진을 생포하지 말고 바로 사살하도록 명하는 등 토벌의 수위는 훨씬 강경하였다. 이천은 평안도의 병력 중 정예병을 골라 뽑고 이들을 3개부대로 나누어 여진의 근거지를 급습 대승을 올리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만주를 생포하거나 사살하는 것은 실패하였다. 

 

 
그러나 이 토벌의 여파로 이만주는 조선에 승복의 뜻을 전하며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였고 한동안은 무력 도발을 일으키지 않았다.


여진의 약탈과 그에 따른 두 차례 정벌 이후 세종은 평안도 일대에도 함경도와 유사한 국경선 방어대책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국경 방어의 전초기지로서 압록강변에 위치한 지역에 새로이 4개 군현을 설치하기에 이르렀는데 이들 군현이 바로 여연군(閭延郡), 자성군(慈城郡), 무창군(茂昌郡), 우예군(虞芮郡)이었고, 이들을 한데 묶어 훗날 4군이라 지칭하였다.

4군 중 가장 먼저 설치된 것은 여연군이었다. 여연군은 함길도 갑산군(甲山郡)에 소속되어 있다가 1416년(태종 16년) 하나의 군현으로 독립하였는데 그 위치는 현재의 중강진 부근이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417년에는 함길도에서 평안도로 소속을 옮기도록 하였다. 이로서 여연과 강계도호부(江界都護府) 지방을 잇는 방어선이 성립함으로서 압록강 국경 방어의 윤곽이 성립되었다.


그러다가 여진의 침략과 그에 대한 조선의 1차 정벌이 있은 후 두 고을의 사이가 너무 멀어 방어가 용이하지 않다는 의견에 따라 두 고을 사이에 새로운 군현을 설치할 것이 논의되었다. 그리하여 1432년 여연과 강계의 중간에 위치한 여연군 소속의 자작리에다 성을 쌓고 여연의 남촌과 강계의 북촌을 가각 소속시킨 후 자성군으로 독립시켰다. 이로서 강계-자성-여연군으로 압록강 유역의 방어 기지가 재편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자성군의 설치 이후에도 압록강의 방어는 용이하지 않았고, 여진족의 침입도 간간히 계속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2차 파저강 토벌 이후 1440년(세종 22년) 본래 하무로보가 있던 지역에 무창현을 신설하였꼬, 1442년에는 무창현을 군으로 승격시켰다. 또 다음해인 1443년(세종 25년)에는 자성과 여연의 중간에 위치하였던 우예보를 우예군으로 승격시키고 자성군의 태일진 등을 소속시키게 하였다. 이로서 1416년~1443년의 약 27년 사이에 압록강 상류지역에 4개의 군현이 신설되기에 이르렀는데, 이를 후대에 4군이라고 명칭하였다.


 

 

반응형

'우리 역사 > 조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조선시대 역사  (0) 2018.10.01
함경도에 6진 설치  (0) 2018.09.30
홍경래의 난과 정주성 전투  (0) 2018.09.30
삼강행실도  (0) 2018.09.29
한산도 대첩  (0) 2018.0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