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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고려140

운문사의 변천 [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삼국유사] 보양이목조에는 "후삼국을 통일하면서 태조왕건은 운문사에 있던 보양국사의 계책으로 이 일대를 평정하였다. 그 뒤 후삼국의 사회적 혼란을 어느 정도 수습한 왕건은 937년(태조 20년), 대작갑사에 '운문선사'라는 사액과 함께 전지 500결을 하사하였다." 고 한다. 이 때부터 대작갑사는 운문사로 개칭되었고,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구축한 대찰로서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1105년(고려 숙종 10) 원응국사 학일이 제3차 중창한 후 왕사로 책봉되었다. 원응국사는 1129년(인조 7) 부터 이 절에 머무르실 때 운문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1277년 일연선사는 고려 충열왕에 의해 운문사의 주지.. 2016. 6. 21.
세속오계와 화랑 화랑도란 옛날 씨족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기원하여 진흥왕 37년 (576년)에 사회제도화해 국가적 조직으로 발전한 것이다. 삼국통일을 이룩한 김유신과 김춘추도 화랑도 출신 화랑도는 진골 출신의 화랑과 낭도의 무리로 구성이 되었다. 국선도, 풀월도, 향도라고 했다. 이들은 친목단체, 교육단체, 무사단체로 5계를 지켜 고상한 기풍과 정의, 인내와 무사도의 정신을 함양시켰다. 이름난 화랑에는 관창, 김유신, 김춘추 등이 있다 2016. 6. 21.
경상도의 운문, 초전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1193년 7월에 일어난 반란. 처음에는 운문, 초전에서 각기 유랑민들을 모아 세력을 따로 이루고 있었으며, 이 반란의 규모는 경상도 전역에 이를 정도로 컸다. 전횡과 부패로 인해 일어났고 각 고을을 노략질했다. 이 반란에서 주목할 점은 무신집권기 발생한 민란들과 달리 서로 다른 지역에서 일어나 상호 연대를 꾀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무신집권기에 발생한 반란들은 규모를 떠나서 특정 지역의 이해관계만 반영하여 일어난 탓에 여기저기서 많이 일어나긴 해도 상호 연계가 하나도 안돼서 중앙에선 어르고 달래고 각개격파하며 쉽게 토벌이 가능했다. 이 반란이 일어나면서 대장군 전존걸은 장군 이지순, 이공정, 김척후, 김경부, 노식 등과 함께 토벌에 나섰으며, 이들이 8월에 공격했지만 이의민이 이들과 내통했다. 이의민의.. 2016. 6. 20.
이의민 아버지는 소금장수이며, 어머니는 사찰의 노비였다. 신장이 8척에 이른다고 기록될 정도로 신체가 장대하였고, 용력이 뛰어나 경군(京軍)에 선발된 뒤 무예로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이 되었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의 난에 가담하여 중랑장이 되었다가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빠른 진급에 대하여 《고려사》에는 그가 정중부의 난 때 죽인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173년(명종 3)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의종 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유배지인 거제에서 경주로 나와 있던 의종을 살해한 공로로 대장군에 올랐다.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고, 그 공으로 무반의 최고직인 상장군에까지 올랐다. 1179년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던 장군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 등을 죽이고 실.. 2016. 6.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