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 역사/고려

이의민

by 산골지기 2016. 6. 19.
728x90

 아버지는 소금장수이며, 어머니는 사찰의 노비였다.

 

신장이 8척에 이른다고 기록될 정도로 신체가 장대하였고, 용력이 뛰어나 경군(京軍)에 선발된 뒤 무예로 의종의 총애를 받아 별장이 되었다.

1170년(의종 24) 정중부의 난에 가담하여 중랑장이 되었다가 장군으로 승진하였다.

그의 빠른 진급에 대하여 《고려사》에는 그가 정중부의 난 때 죽인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1173년(명종 3) 동북면병마사 김보당이  의종 복위운동을 일으키자  유배지인 거제에서 경주로 나와 있던 의종을 살해한 공로로  대장군에 올랐다.

 

1174년 서경유수 조위총이 난을 일으키자 

이를 토벌하고, 그 공으로 무반의 최고직인

 상장군에까지 올랐다.

 

1179년 정치적 입장을 달리하던 장군 경대승(慶大升)이 정중부 등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하자, 1181년 형부상서 상장군에 올랐으나 고향인 경주로 내려갔다가, 경대승이 병사하자 명종이 불러 다시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고참(古讖)에 “용손은 12대에서 끝나고, 다시 십팔자가 나온다(龍孫十二盡更有十八子).”라고 하는 말을 믿어, 그 십팔자가 곧 ‘李’의 파자(破字)이므로 자신이 왕이 될 생각으로 경주일대에서 난을 일으킨 효심(孝心)·사미(沙彌) 등과 내통하기도 하였다.

1194년에는 공신에 책록 되었으며, 인사권을 비롯한 정치의 제반사항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막대한 권력을 기반으로 백성들의 토지를 함부로 수탈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들 또한 탐학을 자행하여 두 아들은 항간에서 쌍도자(雙刀子)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1196년 아들 지영(至榮)과 최충헌(崔忠獻)의 동생인 충수(忠粹)사이에 비둘기로 인한 문제가 발생하여 최충헌 일파에게 살해되었다.

'우리 역사 > 고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속오계와 화랑  (0) 2016.06.21
경상도의 운문, 초전 지역에서 일어난 반란  (0) 2016.06.20
무신정권기 경주인근의 농민반란  (0) 2016.06.19
고려시대  (0) 2016.06.15
고려 역사  (0) 2016.06.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