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우리 역사/고려140

고려 건국 배경 9세기 말엽 신라의 사회모순이 격화되고 중앙집권력이 약화되어 전국 각지에서 호족이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다. 호족들은 10세기 초에 이르러 견훤(甄萱)의 후백제와 궁예(弓裔)의 태봉(泰封)으로 통합되어 신라와 함께 후삼국으로 정립했다. 주로 해상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개성 호족출신인 왕건은 궁예의 부하로 활동하며 커다란 군공을 세웠는데, 918년 궁예의 실정을 틈타 그를 축출하고 왕위에 올랐다. 고구려 계승을 표방하여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하고, 수도를 자신의 근거지인 개성으로 옮기고 내치(內治)에 힘쓰는 한편 외교와 군사작전을 통해 신라·후백제와 대결했다. 후백제의 압력에 견디다 못한 신라 경순왕이 935년에 귀부해오고, 이듬해 내분을 이용하여 후백제를 멸망시켜 후삼국을 통일했다. 2016. 10. 20.
고려와 풍수지리설 고려사회에서 불교와 더불어 귀족 및 일반백성들의 마음을 지배하였던 또하나가 풍수지리설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풍수지리설은 산세의 지형이나 형태가 인간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준다는 사상이다. ◈◈◈◈◈ 풍수 도참 사상에서 도참은 어떤 징후나 신호, 암시등이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길흉화복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 ♣ 도참사상... 풍수지리설과 함께 연관되어 발전 도참사상은 신비적인 해석과 숙명론적인 예언을 통하여 풍수지리설의 설득력을 더욱더 강화시켜 주었다. 풍수지리 이론을 수록한 풍수서는 중국의 것으로 "장서(葬書)", "청오경(靑烏經)" 등이 있다. '풍수' 라는 말은 원래 중국 동진의 곽박이 쓴 "장서" 에서 시작되었다. 풍(風)은 기후, 풍토를 말하며, 수(水)는 물과 관계된 모든 것을 가리킨.. 2016. 10. 19.
상정고금예문 " 상정고금예문" 은 고려 인종 때 최윤의 등 17명이 왕명으로 고금의 예의를 수집하고 이를 고증하여 50권으로 엮은 책으로 현존하지 않는다. "해동문헌총록" 의 해설에의하면, 역대조종의헌장을 모으고, 우리나라 고금의 예의와 당의 예의를 참작하여 위로는 왕실의 의례와 아래로 백관의 장복에 이르기까지 다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신 집권기 이규보가 지은 '신인상정예문발미(新印詳定禮文跋尾)' 를 보면, 최윤의 등이 엮은 이 책이 오랜 세월을 거치는 사이에 책장이 탈락되고 글자가 이지러져 내용을 참고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최우의 선친 최충헌이 보완하게 하여 2부를 작성한 다음, 1부는 예관에 주고 다른 1부를 자기 집에 두었다고 한다. 그런데 몽골군의 침입으로 도읍을 강화로 옮길 때 예관은 황급한 나머지 미.. 2016. 10. 16.
왕건과 호족 포섭 왕건은 호족을 끌어들이는 방법으로 두 가지 정책을 폈다. 그는 유력한 인사들에게 왕가 성을 내려 의사(擬似) 일가를 만들었다. 당시에 본관을 만드는 풍조가 일었는데, 이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것이다. 왕건은 명주(오늘날의 강릉) 장군 순식에게 왕렴(王廉)이란 성명을 내렸고, 발해의 왕자 대광현이 망명해 오자 왕계(王繼)란 성명을 내렸다. 이러면서 혈통이 다른 왕족이 급속히 늘었다. 다음은 혼맥을 통해 묶었다. 왕건은 종친의 딸들을 유력한 세력의 집안으로 시집보냈다. 대광현도 종친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고, 왕건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맏사위로 삼기도 했다. 경순왕의 조카딸은 왕건의 부인이 되었다. 겹사돈을 맺은 것이다. 왕건은 임금이 되기 전에 두 왕비를 두었다. 한 사람은 개성 부근의 호족인 천궁.. 2016. 10.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