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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고려140

화주(和州:지금의 영흥)에 설치했던 관청 고려 후기 몽골이 고려의 화주(和州:지금의 영흥)에 설치했던 관청.| 고려의 동계(東界:동북면) 지역은 특수지방 행정구역으로 고려의 타처에서 온 유이민(流移民)과 여진사람들이 섞여살던 곳이었다. 그런데 몽골이 고려를 침입해오자 1258년(고종 45) 12월 이곳 사람 조휘(趙暉)·탁청 등이 반란을 일으켜 병마사 신집평을 죽이고, 철령 이북의 땅을 가지고 몽골에 항복했다. 그러자 몽골은 화주에 쌍성총관부를 설치하고 조휘를 총관, 탁청을 천호로 임명하여 등주(登州:안변)·정주(定州:정평)·장주(長州:장곡)·예주(預州:예원)·고주(高州:고원)·문주(文州:문천)·의주(宜州:덕원)·선덕진(宣德鎭)·원흥진·영인진(寧仁鎭)·요덕진(耀德鎭)·정변진(靜邊鎭) 등을 통치함으로써 동계지역은 쌍성총관부에 예속되지 않은 명주지.. 2016. 9. 18.
하층민의 저항 최충헌은 앞선 무신정권이 실시한 중방을 폐지하고 최고 권력기관인 교정도감과 강력한 사병집단인 도방을 설치하여 권력기반을 강화했다. 이후 최충헌의 뒤를 이어 아들 최우가 권력을 승계함으로써 최씨 무인정권은 세습정권으로 변해갔다. 최우는 자신의 집에 인사권을 가진 정방을 설치하고, 문인들도 등용하며 권력을 안정시켰다. 무신정권은 국가체제를 정비하지 못한 채 자신들의 이익만을 추구하여 사회 모순을 심화시켰다. 이 때문에 만적의 난, 망이·망소의 난, 전주 관노의 난, 김사미의 난과 같이 권력에 대한 불신과 신분제에 대한 불만을 가진 하층민의 저항도 끊이지 않았다. 2016. 9. 14.
하부계층의 저항과 무신정권 무신정권이 수립된 뒤 농민과 천민의 저항이 계속적으로 일어났다. 지방관과 향리들이 농민에 대해 압박과 수탈을 함으로써 농촌 사회가 피폐되고 유민이 증가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도둑들이 횡행하고 각지에서 저항이 일어났다. 무신정변이 일어나던 의종 때만 하더라도 동주(東州 : 지금의 강원도 철원)·의주 (宜州 : 지금의 함경남도 덕원) 등지에서 대규모의 도둑이 일어났고, 탐라(耽羅 : 지금의 제주도)에서는 수령을 내쫓는 일이 일어났다. 농민의 저항은 무신정권의 성립 이후 더욱 격화되었고, 천민들도 가담하는 대규모 저항으로 발전해 사회는 더욱 혼란하였다. ♣ 무신정권시대에는 그동안 쌓였던 불만이 무신정변으로 인한 하극상의 풍조에 자극받아 폭발했다. 민의 저항 원인은 대체로 농민의 궁핍 및 성장, 중앙통제력의 약.. 2016. 9. 14.
동경민란 동경민란 중에서는 이비를 두목으로 한 일당과 패좌를 두목으로 한 일당 등이 가장 완강하였다. 이들은 신라 부흥을 명분으로 삼아 민심을 선동하였고, 집권자 최충헌은 연이은 반란을 소탕하기 위하여 대규모의 토벌군을 동원하였다 난이 평정된 후 1204년 조정에서는 동경을 경주로, 유수를 지사(知事)로 격하하였다.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 반군 토벌에 공을 세운 안동도호부 (安東都護府)를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고, 경상도의 이름을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로 바꾸었다 2016. 9.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