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고려140 신돈 신돈(辛旽, 1322년 ~ 1371년 8월 21일 (음력 7월 11일))은 고려 말의 승려 출신 정치가이다. 법명은 편조(遍照)로, 신(辛)은 속성이고 돈(旽)은 환속(還俗)하고 나서 바꾼 이름이다. 자(字)는 요공(耀空), 호(號)는 청한거사(淸閑居士)이다. 본관은 영산이다. 경상도 영산현(靈山縣)에서 대족(大族)의 서자로 태어나 승려가 되었고 매골승(埋骨僧)과 떠돌이 승려로서 살았다. 승려로 살면서도 신도를 신분에 따라 차별 대우하지 않아 신도뿐만 아니라 백성에게도 칭송받았고 개경 현화사의 주지가 되었다. 공민왕을 만나 시국관(時局觀)이 왕의 마음에 들었고 이후 노국대장공주를 잃고 실의에 빠진 공민왕에게 등용되어 환속 후 1365년(공민왕 14년) 영문하부사(領門下府事)와 감찰사판사(監察司判事)와 서.. 2016. 12. 18. 고려의 음서 신라 시대에도 음서와 비슷한 채용 방식이 있긴 하였으나 실질적으로는 고려 성종대에 당나라, 송나라의 음보제(蔭補制)를 들여와 5품 이상의 관직에 있는 중신의 아들에게 관직을 제수하면서 시작되었다. 지배층의 관인 지배 체제를 굳건히 하게 되면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는 비율보다 음서로 인한 관직 진출이 더 많게 되었다. 이러한 고려시대 음서는 범음서(凡蔭敍), 범서조종묘예(凡敍祖宗苗裔) 등이 있었다. 음서의 범위는 기본적으로 종실과 공신의 자손이며, 거기에 5품 이상인 관료의 아들, 손자, 사위, 동생, 조카 등이 음서 혜택을 입었다. 그리하여 중견 관리만 되면 그 자손은 자동적으로 관리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5품 이상 관리의 자제라고 해서 누구나 음서의 혜택을 받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그들 가운데.. 2016. 12. 2. 동북 9성의 위치 예종 2년(1107년) 윤관이 별무반을 조직, 17만의 대군을 이끌고 천리장성 동북방의 여진족 정벌 후 쌓은 함주(咸州)·복주(福州)·영주(英州)·길주(吉州)·웅주(雄州)·통태진(通泰鎭)·진양진(眞陽鎭)·숭녕진(崇寧鎭)·공험진(公嶮鎭) 등 9성으로 자세한 위치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고 현재로선 분명히 알 수도 없는데, 이는 설치될 때의 9성과 여진에 돌려줄 때의 9성 명칭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진양진과 숭녕진 대신 의주(宜州), 평융진(平戎鎭)을 꼽기도 한다. 동북 9성의 위치에 대한 대표적인 학설로는 두만강 유역설과 길주 이남설, 함흥평야 일대설이 있다. 윤관이 9성을 구축하자 여진족은 생활 근거지를 잃어버리게 되고, 이에 완안부 오아속(烏雅束)이 중심이 되어 여러 차례 침범하는 한편 강화를 요청하여 .. 2016. 11. 20. 좌별초·우별초·신의군을 총칭하는 군대 무신정권이 무너지자 개경 환도는 순조롭게 실현될 듯이 보였다. 몽골에서 돌아온 원종은 곧바로 신하들에게 환도 문제를 논의하게 했다. 마침내 개경환도 문제가 재추회의를 통과하였다. 그런데 재추회의의 환도 결정에 불만을 품은 삼별초 무리들이 무기창고를 열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다. 당시 환도 결정에 반기를 든 삼별초는 좌별초·우별초·신의군을 총칭하는 군대로서 원래는 최씨 무신정권의 사병이었다. 삼별초의 효시는 최이가 도둑을 막기 위해서 만든 야별초였다. 그런데 점차 인원이 늘어나면서 야별초는 좌·우별초로 다시 확대 개편되었다. 이후 몽골군한테 잡혀갔다가 돌아온 자들로 신의군이 조직되면서 이른바 삼별초란 이름을 얻게 된 것이다. 삼별초는 최씨 집정하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뒤 김준·임연 등이 집정했을 때에도.. 2016. 11. 17. 이전 1 ··· 15 16 17 18 19 20 21 ··· 3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