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회에서 불교와 더불어 귀족 및 일반백성들의 마음을 지배하였던 또하나가 풍수지리설이었다고 할 수가 있다.
풍수지리설은 산세의 지형이나 형태가 인간의 길흉화복에 영향을 준다는 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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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 도참 사상에서 도참은 어떤 징후나 신호, 암시등이 앞으로 일어날 미래의 길흉화복과 연관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 ♣ 도참사상... 풍수지리설과 함께 연관되어 발전
도참사상은 신비적인 해석과 숙명론적인 예언을 통하여 풍수지리설의 설득력을 더욱더 강화시켜 주었다.
풍수지리 이론을 수록한 풍수서는
중국의 것으로 "장서(葬書)", "청오경(靑烏經)" 등이 있다.
'풍수' 라는 말은 원래 중국 동진의 곽박이 쓴 "장서" 에서 시작되었다.
풍(風)은 기후, 풍토를 말하며, 수(水)는 물과 관계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
*** 남경천도론과
묘청의 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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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때에는 남경 천도론이 있었는데 이때에도 풍수리지설 사상이 크게 영향을 주었다. 또 풍수리지설을 기초로 하여 반란으로 묘청의 난을 들수가 있다.
묘청의 비롯한 서경파 세력들은 개경보다 서경이 지세가 좋기 때문에 서경으로 도읍을 옮겨야 한다고 주장 하면서 묘청의 난을 일으켰다.
그러나 묘청의 난은 유교사상을 바탕으로하는 개경파에 의하여 진압이 되고 말았다.
당시 개경파의 대표자인 김부식은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하여 서경파를 탄압하였고 묘청은 평안도 일대로 세력을 확장하며 저항하였지만 결국 정부군에 의하여 진압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