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정원에는 대구땅과 조선을 위한 선교의 삶을 사시다 묻히신 분들 외에도 곳곳에서 작은 묘비들을 찾아볼 수 있다. 바로 선교사님의 자녀들의 무덤이다. 핸더슨버디(Henderson Buddy)는 계성학교의 교장 핸더슨(현거선)의 아들로 1920년 6월 5일에 출생해 1921년 9월17일로 단명했다.
루스 번스턴(Ruth Bernsten)은 1917년 구세군 대구지방관 번스턴의 딸로 1918년 10월 7일 출생하여 1919년 1월 28일 사망했다. 그녀의 묘비에는 “Our Darling Rut"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다.
조엘 로버트 핸더슨(Joel Robert Henderson)은 1964년 태어나서 몇 시간 살지 못하고 사망했다. 헬렌 맥기 윈(Helen McGee Winn)은 북장로교 윈 선교사 부부의 갓난 딸이다. 윈은 안동에서 경안노회를 창설하고 안동성경학교를 설립한 분으로 헬렌 맥기는 1913년 11월 10일에 출생하여 열흘만에 숨을 거두었다.
이렇듯 먼 이국땅에서 제대로 한번 꽃을 피워보지도 못한 수많은 아이들이 죽어갈 때 부모였던 선교사님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말처럼 그들의 가슴에 사랑하는 아들, 딸을 묻기까지 사랑했던 이 땅 조선! 그리고 대구!!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이 이 분들의 마음에 있었기에 선교사의 삶은 계속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은혜의 복음의 빚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①
넬리 딕(NELLIE DICK)은 아담스 선교사의 아내이자 대구지역에 발걸음을 낸 첫 번째 여자 선교사였다. 넬리 딕 선교사의 묘에는 “SHE IS NOT DEAD BUT SLEEPTH." 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그녀는 죽은 것이 아니며 아직도 이 땅과 이 땅에 있는 한국인들을 위해 자신의 영혼은 살아서 기도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선교사의 꿈을 일상을 통해 보여준 주인공이었다. 그녀는 3개월 된 아들(안두화 : 계명기독대 창설)을 안고 태평양을 건너와 날마다 대구땅을 향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달라고 기도드렸다.
그녀는 몸을 돌보지 않고 제일교회 부인주일학교 교장, 전도부인 담당, 부인사경회인도와 순회전도, 신명학교 출강, 정규 전도부인 강습회 출강 등으로 다양한 선교활동을 하는 열성을 보였다. 그러다 1909년 10월 31일 유산 후유증으로 43세의 나이로 숨져 고국을 떠나 대구 은혜정원에 묻힌 최초의 외국인이 되었다.
② 쏘텔 선교사.
은혜정원 가장 오른쪽에는 쏘텔(CHASE CRANFORD SAWTELL)이라는 한 젊은 여선교사의 묘비가 있다. 1907년 10월 16일 부부선교사로 신혼의 나이에 이름도 잘 몰랐던 한국땅, 그리고 대구라는 곳에 와서 숨을 거든 그녀에겐 한 가지 꿈이 있었다. 그것은 대구땅을 향한 선교를 넘어 더 내륙지역이고 당시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던 경북북부지역 안동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안동땅을 향해 기도하며 대구에서 그 곳으로 가기위해 준비하던 도중 풍토병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죽게 되었다. 그녀의 묘비명에는 “I am going to love them." 이라는 문구가 쓰여져 있다. 자신은 죽지만 여전히 이 땅의 사람들을 사랑하겠다고 하는 그녀의 의지가 담겨져 있는 말임에 틀림없다. 그녀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죽음에 가슴아파한 동료선교사들은 쏘텔의 소망을 간직하고 자신들이 안동땅에 가서 복음을 전하자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쏘텔의 꿈을 안고 아담스 목사가 안동 귀미시장에서 전도할 때 국곡사람 권수백이라는 사람이 쪽복음을 받아 읽던 중 감화를 받아 믿기로 작정하고 진리를 더 알기 위해서 선교사의 뒤를 수소문하여 찾아간 곳이 안동군 와룡면 지내리(장수동)였다. 그는 거기서 홍재삼(洪在三)의 집에 유숙하고 있는 선교사를 만나 가르침을 받고 돌아왔다. 권수백은 동문들과 문중의 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전도한 결과 믿는 사람들이 불어나게 되어 김병석, 김병일의 가정에서 돌아가며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것이 안동 최초의 교회 국곡교회의 시작이 된 것이다.
또 하나의 일화는 안동에 가 복음을 전하다 그곳에서 한 가난한 농부를 만나게 되고 그 농부는 복음을 듣고 너무나 감격하여 하나님께 감사해 합니다. 하지만 농부가 자신은 영원한 생명이라는 선물을 얻었지만 자신은 정작 하나님 앞에 드릴게 없자 자신의 자녀들을 주의 종으로 바치겠다고 서원하고 아들들을 목사로 키우게 된다. 그리고 목사가 된 자녀 중에 한분은 아버지의 뜻을 받아들여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자신도 그의 아들을 주의 종으로 세워가고 싶다고 기도한다. 그리고 그 아들이 목사가 되는데 그 분이 사랑의 교회 오정현 목사님이다.
바로 이렇듯 쏘텔은 안동땅에 복음한번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오히려 밀알이 되어 더 많은 열매를 안동땅에 맺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③ 대구여성교육의 어머니 - 마르타 스캇 브루언 선교사.
마르타 스캇 브루언(부마태)선교사님은 남편인 브루언 선교사를 따라 1902년 5월 10일 대구땅에 오시게 된다. 남문안예배당 구내 초가에는 존슨의 부인 에디스 파커가 소녀들을 위한 바느질 반(sewing class)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마르타 스캇 브루언은 그 소녀들을 대상으로 신명여자소학교를 설립하였다. 1907년에는 동산위에 있던 부인용 사랑채에 신명학교를 설립하여 대구 여성교육의 선구자가 되었다. 미국 펜실베니아주에서 태어난 그녀는 제일교회 부인주일학교 교사와 농촌교회 여전도회를 조직하고, 부인사경회를 인도하기도 했다. 1930년 10월 20일 55세의 일기로 소천하였다.
마르타 스캇 브루언 선교사가 이곳으로 오게 된 이야기가 전해진다. 그녀는 원래 조선을 향한 선교의 마음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이 사랑하는 남편 브루언과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리고 브루언을 도와 자신이 힘이 될 수 있다면 그녀는 태평양을 건너올 마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그녀의 사랑과 내조가 있었기에 브루언 선교사의 사역과 대구땅에 여성학교 교육이 활발히 일어날 수 있었다.
④ 내려놓음!! - 마르타 스윗츠 선교사.
처녀 순교자였던 마르타 스윗츠 선교사는 뉴욕 칼럼비아대학을 졸업한 처녀 선교사로 부유한 집안에 수재였던 그가 본국에서 보장된 편안한 삶을 뒤로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몸 바친다는 각오로 이 좁은 문을 선택했다. 해외선교를 자원하여 1911년 대구땅을 밟은 뒤 월급도 없었을 뿐더러 사유재산까지 다 받쳐 가며 사역하였다. 그녀는 연합당회가 설립한 대구명도학원에 2천원의 거금(당시 쌀 한가마 10원)을 내고 연합회가 제일동포를 위해 전도사(강성숙)를 파송하자 남은 유산 550원마저 기부하였다. 바로 그녀가 남긴 유산으로 일본 나고야와 만주 한인촌에 선교사를 파송하게 된 것이다. 명예나 보수를 바라지 않은 진정한 사역자였으며 교회를 찾은 조선 여성과 어린이들에게 헌신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그렇게 즐거워하며 감사하며 대구땅에서 18년간 봉사하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소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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