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에도 뽕나무 골목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에 명나라 제독 이여송과 함께 우리를 돕기 위해 왔다가 결국 조선에 귀화한 사람, 바로 두사충 장군이다. 두사충이 귀화하자 조정은 그가 터를 잡은 현재의 대구 시내 경상감영 터를 하사하여 살도록 하였다.
두사충이 받은 땅에 경상감영이 옮겨오게 되자 그는 그 땅을 내어주고 계산동에 집을 짓고 주변에 뽕나무를 심으며 업을 이어나가게 된다. 이때부터 계산동 일대는 두 씨들의 세거지가 되었고 주위에 많은 뽕나무들을 심었고 그 때문에 이 일대를 뽕나무 골목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이 뽕나무 골목길에서 한 서양인 선교사가 혀 짧은 소리로 열심히 기독교 복음을 전하고 있었다.
어느 듯 골목 안은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코쟁이를 보고 싶은 호기심에서, 아니면 새로운 가르침에 대한 열망 등으로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가득하였다.
그때 한 지게꾼이 나무를 한 짐 가득히 지고 지나가고 있었다. 늘 다니는 길목이지만 오늘따라 사람들이 왜 그리 많은지 그는 안간힘을 쓰면서 골목을 빠져나가려 하였다. 그런데 그만 지게에서 삐져나온 솔가지가 전도하던 아담스 선교사의 얼굴을 긁고 말았다.
날카로운 솔가지에 긁힌 선교사의 얼굴에는 금방 한줄기 피가 흘려 내렸다. 당황한 나무꾼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고 그저 그 광경을 쳐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아담스 선교사는 아무 말도 없이 자신의 손수건으로 상처 난 얼굴을 닦으며 말했습니다. “괜찮습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좀 주의했다면 이런 일이 없을 터인데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늙은 나무꾼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송구함을 표시하고는 지게를 지고 지나갔다.
그때 아담스의 전도 강연을 들으며 이 광경을 유심히 지켜본 한 사람이 있었다. 그는 백인이 야단치는 광경을 기대했는데, 도리어 자신의 잘못으로 사과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독교라는 종교가 어떤 것인지를 직감하고 그날로 믿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이름은 서자명(徐子明)으로, 그의 본명은 서면욱(徐勉煜)이었으며, 1860년 대구 남성정에서 출생하였다.
하지만 서자명의 삶은 이때부터 고단하였다. 대구를 대표하는 달성 서 씨 문중에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개화를 상징하는 것이었고, 이는 전통과 조상을 버리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서자명이 교회를 출석하기 시작하자 개화인의 행세를 한다는 명목으로 문중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입적(入籍)하면서 동시에 세상 가문에서 축출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그 어떤 고난도 그의 믿음을 꺾을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