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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교회사 연구소

최초 교회

by 산골지기 2015.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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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후반 남만주는 국경무역에 종사하는 진취적인 조선인들의 활동 무대였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 전래의 한 통로가 되었다.

 

 봉천과 영구에 주재하는 존 로스, 존 맥킨타이어 목사는 우리 청년들과 성경번역에 착수했다.

 

 1881년 존 로스 목사는 서간도를 방문하고 북곡 등지에서 조선인 85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조선어로 번역된 성경을 인쇄하던  김청송은

 고향인 집안으로 가서 성경과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이 때 교회가 설립되었을 가능성은 많지만 기록으로 전하지 않고 있다.

이 지역에 우거하던 신자 이성삼과 임득현은 어려운 유이민의 생활 가운데서도 열심히 전도하여 수 십 명의 성도를 확보하고, 1898년 집안현 유수림자 이양자에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세웠다

 이듬해 이양자교회는  의화단의 봉기로 피해를 받았다. 의화단은   교회와 신자들의 집을 불태우고, 생명을 위협했다. 

 

집안현 유수림자(楡樹林子)의 현재 지명은 유림진(楡林鎭)이며, 유수림하(楡樹林河) 지류(支流)가 만나는 곳에 위치하고 있다. 유수림하는 압록강과 합류한다. 유림진에서 동쪽으로 약 3 Km 지점에 위치한 양자촌(陽子村)이 조선예수교장로회사기(1928년간)에 나오는 이양자(裡陽子)로 사료된다.

 

 

양자촌의 계곡을 따라 약 3km 올라가면 계곡이 Y자 모양으로 갈라진다. 상류로 오르는 사람의 왼쪽 계곡을 교당골[敎堂溝]이라고 이 지역에서는 불러왔다.

 

교당골을 약 2km 계속해서 진입하면 오르는 사람의 왼쪽 계곡 가에 한 바위(최대 높이 2,7m, 최대 둘레 6m)가 있고, 그 바위의 평면에  야소교 초립 비명이 있다. 보는 사람의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위에서 아래로, “耶穌敎 初立 1898 됴선人”이라고 새겨져 있다. "耶"의 크기는 6cm이다.

 

 이 바위로부터 왼쪽 전방으로 비스듬히 산등성이를 오르면

약 200m 지점에 소규모의 축대로 평평하게 된 옛 교회 터가 있다.



비명이 언제 새겨졌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이양자교회 신자들이 의화단 사건으로 피신하였을 때 신자 중 기술자가 작업한 것으로 사료된다.

 

의화단 봉기 때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 심산궁곡(深山窮谷)으로 피신하여 ‘약가루’ 국수 즉, 옥수수 가루에 점액질을 높이기 위해 소량의 느릅나무[楡樹] 뿌리 가루가 첨가된 국수를 즐겨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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