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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교회사 연구소

한국 교계의 거성 길선주

by 산골지기 2015.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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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북 서북쪽 깊숙한 골짜기에서부터 여러 갈래의 산맑은 산여울이 합쳐서 큰 물줄기를 이루어 황해로 내닫는 청천강 남쪽 기슭에 자리잡은 안주땅은 일찍이 고구려의 맹장 을지문덕이 수나라 양제(煬帝)의 100만 대군을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맞아 과감히 무찔러 빛나는 전공을 세운 고장이다. 고려시대에는 도절제제사영(都節制使營)이 있었고 이조 세조(世祖) 때에 진(鎭)을 둔 요지이며, 평양의 관문으로서 중죽으로 뻗어나간 대로가 통과하는 관계로 이 고장은 외교사절과 상인의 왕래가 빈번하고 많은 고을이 인접한 산업의 중심지였으므로 사람들은 일찍 재리(財理)에 눈떠 있었다.

한국 교계에 거성 길선주는 1869년 이곳 안주 후장동에서, 무사인 길봉순씨의 차남으로 출생했다. 그의 부친은 무과에 급제하여 노강첨사(老江僉使)의 벼슬을 한 분이었다. 네 살 때부터 모친에게서 한문을 익히고, 일곱살이 되자 글방에 다니면서 한학을 공부했다. 그는 총기가 있어 학업이 남달리 뛰어났으며 사고력과 정서도 풍부했다. 선주는 여덟살 되던 해의 어느 날, 같은 또래의 두 아이들과 함께 뜰에서 구름을 쳐다보면서 말했다.
“저쪽 학의 날개와 같은 구름이 내거냐”
“저 산 봉우리 맨 위의 접시 같은 구름이 내거야”
한 아이가 말했다.
“그럼 그 아래 주먹같은 구름이 내거야”
또 한 아이의 말이었다.
아이들은 저마다 이렇게 자기가 좋아하는 모양의 구름을 가리키면서 서로 자기 구름이 멋있다고 우겨대었다. 이윽고 이 구름은 서풍에 의해 그 형태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것을 보자 선주의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왜 그래?” 두 아이가 일제히 물었다.
“우리 구름들이 다 없어지니 저절로 눈물이 나”
“임마, 그럼 구름이 늘 그 모양대로 있는 줄 아니? 병신같이....”
한 아이가 선주의 머리를 쥐어박으면서 말했다.
“그건 나도 알고 있어.”
“그런데 뭣 때문에 우는거야?”
“우리도 나중에는 저 구름처럼 없어지고 말게 아니야?”
선주는 이렇게 다감하고 조숙했다.
선주는 당시의 풍속에 따라 열 한 살 때 안주 성내의 같은 무관인 신선갈(申先達)이 외동딸 선행(善行)양과 결혼하였다.
하루는 서당에서 오전 공부를 마치고 점심 먹으러 집에 돌아온 선주는 곧장 부엌에 들어가 솥에서 밥을 퍼담는 아내에게 손을 내밀며
“나 누룽지 좀 줘.하고 졸라대었다.
이것은 이미 상투를 틀어 올린 지체 높은 가문의 서방님으로서 체통이 서지 않는 일이었다. 아내는 한동안 잠자코 있었으나 하도 성가시게 졸라대는 바람에 그만 화가 치밀어 “점잖치 못하게 이게 무슨 짓이에요?” 하고 부지깽이를 집어들고 덤벼들었다. 선주는 얼른 몸을 피해 부엌 뒷문으로 도망치다가 뒷뜰에서 어머니와 맞닥뜨렸다. 어머니는 혹시 어린 남편이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지나 않을까 싶어 걱정하면서 뒤좇아 나온 며느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냐?”
그러자 선주가 아내 대신 얼른 둘러댔다.
“글세 내가 방안의 아버님 수저를 가져 오겠다는데 제가 가져온다고 이 야단이지 뭐예요”
당시에 지체 높은 집안에서는 수저를 아름답게 수를 놓은 수저집에 넣어 안방에 따로 보관하는 것이 상례였다. 어린 선주가 임기응변으로 잘 둘러대었기에 망정이지, 사실이 그대로 알려졌다면 며느리는 큰 변을 당하게 되었을 것이다.

어느 여름날이었다. 선주는 이웃에 사는 아이들과 어울려 연을 날리다가 (평안도에서는 여름에도 연을 날린다.) 그만 발을 헛디딘 바람에 두엄발치에 빠져 온몸이 거름 투성이가 되었다. 선주는 얼른 집에 뛰어가 자기 방문을 두드리면서 아내를 불러내었다. 아내가 문을 열고 내다보니 꼬마 신랑이 온몸이 거름을 뒤집어쓰고 히죽히죽 웃으면서 있었다. 그녀는 어이가 없었다. 얼른 옷장에서 새옷을 한벌 꺼내 가지고 신랑을 뒷뜰에 우물가로 데리고 갔다. 신랑을 홀랑 벗기고 나서 몸을 깨끗이 씻고 이제 치부만 남았다. 아내가 한참 망설이다가 손으로 치부에 물을 끼얹자 신랑은 눈을 살짝 흘기면서 말하는 것이었다.
“뭐 거긴 관둬!”
이때 먼 발치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시어머니가 다가와서 물었다.
“볼상 사납게 거기서 뭣들을 하고 있는 거냐?”
며느리가 얼른 대답했다.
“네, 서방님이 연을 날리다가 소똥에 넘어지는 바람에 그만....”
시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면서 얼른 지나갔다.

그해 8월 추석이었다. 선주는 아내 등에 업혀 뒷동산에 올라가 달 구경을 하고 있었다. 아내가 사람들이 많이 오가고 있는 것을 내려다보자 어린 신랑은 아내의 두 귀를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뭘 그렇게 내려다보는 거야”
아내의 대답은 이랬다.
“흥, 등에 업힌 서방님의 강짜가 너무 심하네요”

(농부의 아내를 만들지 말지니)
(해마다 고생이 이와 같도다)
(옥 같은 소니에 신고가 그치지 않고)
(꽃다운 마음속에서 팔자를 한탄하네)
(청루에 있는 것은 뉘집 딸인고)
(밤마다 끄리는 옷이 닳는 소리뿐일세)

이것은 선주가 12세 글방 백일장(白日場)에서 장원한 시이다. 제목은 十指不動衣ㅅ (열 손가락을 까딱도 하지 않는데 옷상자에 옷이 가득 찼네) 그는 시문에 상당한 재질이 있었다.

그는 17세때 안주에서 우위도식하던 불량배 윤학영(尹學榮) 3형제로부터 억울하게 무수히 구타를 창하였다. 그의 부친은 아들의 원수를 갚기 위해 식구를 거느리고 평양에 이주까지 했으나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선주 자신은 인생의 고뇌를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허망한 현세에서 불변의 영계(靈界)를 동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은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었으며, 또 현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부친은 이미 늙어 그가 집안 살림을 보살펴야 할 처지였다. 그는 평양의 거상 이재경(李在璟) 씨의 상점에서 1년 동안 상술을 익히고 18세 때 따로 상점을 경영하였다. 그는 성격이 맞지 않는 점포를 꾸려가는 동안에 이해와 타산에 매인 생활에 대해 환멸을 느꼈고 늘 자기 자신을 자책하며 살았다. 평양 북마을의 면장으로 있으면서 첩을 두고 두 집 살림을 하던 형은 물건을 닥치는 대로 가져다 쓰고 원금도 갚지 않았다. 게다가 그는 장사에 으레 따르게 마련인 에누리를 할 줄 몰라 매상은 올렸지만 이문을 내지 못해 결국 장사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래저래 그는 세태에 대한 실망과 혐오만 더하여 염세에 빠진 데다가 깡패들에게 두둘겨 맞은 어혈(瘀血)로 허약한 몸에 중병까지 겹치게 되었다. 다행히 부인의 극진한 간호와 부모의 정성어린 보살핌으로 병세가 차츰 호전되었으나, 그는 세상이 싫어 살맛이 나지 않았다.

그는 막연하나마 수도에 뜻을 두고 관성제군(關聖帝君-關羽를 높이는 관성교)의 보고문(譜告文) 몇 가지를 읽기 시작했다. 그가 정성껏 이 보고문을 외운 어느 날 밤 꿈에 관공(關公)과 한 중이 나타나 서로 희롱하는 것을 보고 “중이 어찌 관공과 희롱할 수 있단 말인가”하고 말했더니 옆에서 어떤 사람이 “그에게 보정 대사(保精大師)를 몰라보나? 을밀대(乙蜜臺-평양 명승지 금수산에 세워진 정자)로 가보게” 하는 것이었다.
하도 신기한 꿈이라 길선주는 이튿날 을밀대에 올라가서 주위의 절경에 도취되었으나 피로가 겹쳐 어느새 사르르 졸음이 와 돌을 베고 한참 자고 깨어났다. 그때 두 사나이가 다가와 그를 한 사람이 “보아하니 이 젊은이는 세상을 비관하고 도를 숭상할 생각이 간절하군”하고 한 마디 던지는 것이었다.
길선주는 첫눈에 자기 마음을 환히 꿰듫어 보는 것으로 보아 필경 도사임에 틀림이 없고 어제 밤 꿈에 을밀대로 가보라고 일러 준 것은 신의 지시였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그 사람에게 정중히 인사를 하였다.
그러자 “나는 함경도 사람으로 김순도(金舜 )라고 하오. 호는 창일(蒼日)이라 부르오”하고 사나이는 선선히 대답했다.
“저를 창일 선생의 제자로 삼아 주실 수 없겠습니까?”
길선주가 간청하자, 부모님의 허락한다면 운산 벽운암(雲山 碧雲岩)에 가서 새해 겨울 동안 공부를 시켜 주겠다고 말했다.
길선주는 집에 돌아와 부친에게 자기 뜻을 밝히고 창일 선생에게 가서 수도하고 싶다고 했더니, 부친은 “안된다”고 한 마디로 거절하셨다. 그러나 길선주는 수도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여 여관에 묵고 있는 창일 선생을 찾아가서 부친의 허락을 받았으니, 선생을 따라 가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창일 선생은 도를 닦으려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면 되나”하고 책망하는 것이었다. 길 선주는 그의 예리한 통찰력에 다시 감탄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그의 문하생이 되어야겠다고 마음을 굳게 먹었다. 길선주가 칠성문 밖까지 그의 뒤를 따라가면서 제자로 삼아 줄 것을 여러번 간청했더니 선생은 마지못해 산신차력주문(山神借力呪文)을 써 주면서 말하였다.
“어느 조용한 암자에 가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이 주문을 외우면 한 주일이 못가서 영(靈)이 내려 몸이 떨리고 마음이 상쾌해지면서 힘을 얻어 도에 취미를 느끼게 될걸세”
길선주는 창일 선생과 작별하고 집에 돌아왔다. 그는 며칠 후에 대성산 두타사에 가서 조용한 방 하나를 얻어 자취를 하면서 밤낮으로 열심히 [산신차력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애써 잡념을 없애고 사흘만에 무아지경(無我之境)에 이르게 되자 차츰 몸이 떨려오더니 아닌게 아니라 기력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계속해서 7일간 주문을 외우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몸과 마음이 상쾌해지고 생기가 돌아 병에서 완전히 놓여나게 되었다. 그는 비로소 삶의 비결을 찾은 듯싶어 도에 전념할 것을 결심했다.


길선주는 본격적으로 수도에 전념하기 위해 평양에서 도사(道士)로 알려진 장득한(張得漢) 선생을 찾아갔다. 장선생은 수십년 동안 선도(仙道)를 수련한 분으로 절간에서 경(經)을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장선생에게 정중히 인사를 올리고 그 동안의 경위를 말한 다음 “앞으로 많은 지도를 바라겠습니다.” 하고 간청했더니, 선생은 쾌히 승낙하고 우선 경의 구령삼정 주송법(九靈三精呪誦法)을 가르쳐 주었다. 그 주문(呪文)은 이러했다.

천생(天生), 무영(無英), 현주(玄珠), 정중(正中), 자단(子丹), 회회(回回), 단원(丹元), 태연(太淵), 영동(靈童), 대광(台光), 상령(爽靈), 유정(幽精).
이어서 그는 장선생으로부터 삼령주문(三靈呪文)을 배웠다.
비천 중천(飛天中天)하니 삼령신군(三靈神君)이라 삼령신(三靈神)
사사강어(事事降於) 제자(弟子) 길선주 하소서
도유신(道有神)헉흐 신유통(神有通)하니 천(天)이라 천은 천에 천하니 사수사수(事授事授) 대(大)하소서

길선주는 깊은 산속에 암자에 가서 위의 두 주문을 수만 번 외우고, 때로는 밤을 뜬눈으로 새우면서 열심히 송독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19세에 시작한 관성교의 연구를 중단하고 21세 때부터 선도(仙道)의 수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해마다 서너 차례씩 산사를 찾아가서 경을 연구하는 한편 21일 혹은 49일 또는 100일 동안 주문을 외우면서 수도에 몰두했다.
이것은 말이 쉽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신통력(神通力)을 얻기 위한 수도로서 순간이라도 잡념이 들어가서는 안되므로 예정한 기간 동안은 정신을 집중시켜야만 했다. 그리하여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부와 주송(呪誦)에 전념하다가 심신이 피로하여 잠이 오면 엄동 중이라도 얼음물에 목욕하여 잠을 몰아내거나 다리에 뜸을 놓아 졸림을 깨우기도 하고 심지어 불을 붙여 손가락 끝에 지지기도 하는 고된 수련이 뒤따랐다. 이렇게 해서 수도에 몰두하노라면 때로는 방안에서 갑자기 아름다운 옥피리 소리가 들려오기도 하고, 옆에서 탕 하고 요란한 폭발 소리가 들려와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이처럼 선도의 수련에서 신비로운 체험을 얻게 되자 길선주는 갈구하던 진리를 발견한 기쁨을 혼자서 마냥 느끼는 것이었다.
그는 이 기쁨을 아내와도 함께 나누기 위해 아내에게 선도를 가르쳐 주었다. 그리하여 부인도 그와 함께 밤을 새워 주문을 열심히 외워 온 몸이 떨리는 강령(降靈)을 체험하게 되었다.
때로는 방안에 앉아 주문을 외우는 자세로 몸이 두세 척 높이 뛰어 오르기도 했다. 그 후부터 부인은 몸이 건강해지고 마음도 평안하여 두 내외는 이보다 더 좋은 도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영생의 이치를 찾아내지 못한 길선주는 아직도 세상을 비관하여 번민이 가시지 않았다.
그는 이것은 자기의 도(道)가 부족한 탓으로 생각하고 수도에 더욱 전념하기로 했다. 그가 선도와 신차력(神借力)으로 얻은 힘은 놀라운 것이었으나, 이에 만족하지 않고 수차력(水借力)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23세 때의 일이었다. 수차력이란 물을 마셔 힘을 얻는 것을 말한다. 즉 자정마다 한번에 일곱 대접의 정화수(井華水)를 마시면 배에 힘을 얻고 피를 맑게 하며 하체의 기운을 보강한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길선주는 이 수차력으로 배에 힘을 주면 사람들이 주먹으로 그의 배를 아무리 힘껏 후려쳐도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는 굉장한 장사가 되어 통나무 목침을 주먹으로 부수고, 다듬이 방망이를 손으로 부러뜨리는가 하면, 웬만한 개천은 단숨에 건너뛰어 사람들이 그를 호랑이라고 불렀다. 그는 정력도 뛰어나 60이 지나도 정력이 감퇴되지 않았으며, 성경을 암송하는데 아무지장도 받지 않았다.

어느 날 평양에서 불량배들 사이에 패싸움이 시작되어 양민(良民)까지도 해치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길선주는 절에서 내려와 이 소식을 전해듣고 곧 패싸움의 주모자들을 불러 타일렀다.
“너희가 작당해서 성내를 온통 시끄럽게 해서 되겠느냐, 각자 자기 일에 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야지....”
“우리 일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괜한 참견은 말아줘” 한 사나이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싸움을 해도 너희끼리나 할 일이지, 애꿎은 다른 사람들까지 왜 해치는 거냐?”
“뭐가 어쩌구 어째?” 그는 팔을 걷어 붙이고 길선주에게 덤벼들었다.
길선주는 씩 웃고 나서, 방안 화로에 꽂힌 부손을 들고 나와 말했다.
“너 우선 이것부터 네 손으로 꺾어 보고 나서 덤빌테면 덤벼 보아라”
그는 부손을 받아 들고 꺾으려고 했으나 어림도 없었다.
그러자 길선주는 그에게서 부손을 받아들고 단숨에 꺾어 버렸다.
“몇 푼어치도 안되는 힘으로 무슨 행패를 부리는 거야? 모두들 집에 돌아가 자기 일이나 착실히 해” 하고 그는 그들을 훈계해서 돌려보냈다.
선도에 통달하고 차력(借力)에 일가를 이룬 그의 명성은 차츰 주위에 널리 퍼져, 사방에서 선도를 배우고 차력을 연마하기 위해 사람들이 잇따라 모여들었다. 그리고 수도에 힘쓰는 선비와 나라를 걱정하는 지사(志士)들도 찾아 왔다. 그는 이들과 담론을 하면서 한때를 모내는 것이 즐거운 소일거리이기도 하였다.
그는 선도에 전념하여 신령한 체험을 많이 했으나 건장한 육체의 본능적 욕구는 아직 극복하지 못하였다. 그가 25세 때의 일이다. 산사에 들어가 수도를 하다가 선도를 배우러 온 묘령의 여자와 그만 뜨거운 사이가 되어 한때 외도에 빠지고 말았다. 그는 곧 범부(凡夫)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자기자신의 수양 부족을 통감하고, 다시 수도에 열중하였다.
한편 그는 인격의 조화된 육성을 위한 예술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껴 일찍 서화와 모용, 풍악을 익혀 일가견을 갖게 되었다. 그의 집에는 언제나 종이와 필묵이 갖춰져 있어, 시인 묵객(墨客)들이 자리를 같이하여 시를 읊고 서화로 회포를 풀기도 하였다. 그리고 장고, 북, 단소, 해금 등이 준비되어 있어 악인(樂人)들이 모여 연주와 춤으로 흥겹게 보내기도 했다.
이렇게 그가 선도와 시화, 무악 등으로만 소일하니 자연 살림은 억망이 되었다. 어느 날 깊은 밤중에 주문을 외우는데 비몽사봉간에 평양 임원방(林原坊)에 살고 있는 황인후(黃仁后) 형이 오정때 나타나 허리띠에서 엽전 열냥을 꺼내 주었다. 깨어나 보니 새벽 한 시였다. 그는 날이 밝으면 오전때쯤 황 인후가 엽전 열 냥을 갖고 올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침에 그가 조반을 먹으러 안방에 들어가 상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식량이 떨어졌으니 어떻게 한담!”
하고 부친이 혼잣말처럼 탄식을 했다. 길 선주가 말했다.
“아버님, 과히 염려 마십시오. 오늘 오정 때 황인후형이 엽전 열 냥을 보내올 겁니다.”
“황서방이 웬 일루...”
부친은 말끝을 흐리면서 의아한 얼굴로 아들을 쳐다보았다.
“네 두고 보시면 아시겠지만 그렇게 될 겁니다.” 길선주는 부친 앞에서 이렇게 장담했다. 그러나 부친은 아들의 말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오정때가 되자 과연 황인후의 조카 기풍(基豊)이 찾아와서 엽전 열냥을 내놓으면서 “이 돈 삼촌이 갖다 드리라고 해서 왔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부친은 아들이 과연 대도(大道)에 통했다고 생각되어 대견스럽기 짝이 없었다.
또 한가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가 성교육을 중요시했다는 사실이다. 인간에게 주어진 본능 중에서도 성의 축복을 만족하게 누리는 것은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똑똑한 자식을 낳는데 요긴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성을 하나의 예술로 보았다. 예술의 공통된 특징이 조화라면 이성간의 조화의 극치가 예술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그는 이 생동적인 예술은 하나의 새 생명을 창조하는 매우 자연스러운 삶의 작업이라는 인식을 자녀들에게 심어 주었다. 그는 이 방면에서도 일가를 이루어 성문제로 일어난 여러 가지 가정 분규를 해결해 주었으며, 성교육은 민족 개량의 하나의 중요한 방법이라고 강조하고 이것을 [영웅을 낳는 법]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성에서 향락 위주로 흐르는 것을 배격하고, 향락주의는 파괴에 이르는 넓은 길이라고 경계하였다.


19세에 관성교(關聖敎)를 숭상하고 21세에서 29세까지 9년동안 선도(仙道)에 심취된 도인 길선주가 기독교에 입신하게 된 경위에는 적지 않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어느 날, 평양에서 이런 소문이 떠돌고 있었다.

“평양에 괴상한 사람이 하나 나타났다더라.
키가 꺽다리이고, 파란 눈이 우묵 들어가고, 코가 크고, 머리털은 볼그레하고 옷은 괴상하게도 쳇다리 같은 바지에 무당의 덧옷 같은 긴 저고리를 입고, 말은 무슨 말인지 도대체 알아들을 수 없는데, 그게 바로 양귀자(洋鬼子)라고 하더라. 그런데 그 사람이 양교(洋敎)라는 교를 가지고 와서 전하는데, 한번 거기 발을 들여놓으면 혼을 뽑아서 미치고 만다더라“는 것이었다.

 

선교사에 대한 이런 유언비어는 삽시간에 쫙 퍼져 온 성내가 떠들썩했다.

 

 이 괴상한 인물은 한국에 파송된 마펫 선교사인데 

 1890년 1월에 제물포를 거쳐 서울에 도착했으며,

1890년 8월에 평양에 와서 여문 앞 김선달의 집에서 유숙했다.

 

그때 기독교에 귀의한 한석진(韓錫晋)씨가 평양에서 마펫 선교사의 일을 돕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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