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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교회사 연구소

한경희 목사

by 산골지기 2015.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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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신학교 14회 졸업생 중에 한경희 목사가 있다.

 

 그는 1935년에 공산당원에게 총을 맞아 죽었고,

그의 맏아들 청옥은 공산당원으로 민족주의자에게 총을 맞았고,

둘째 아들 순옥은 해방 이후에 공산당원에게 피살당하였다.

 

한경희 목사 일가는 공산당원과 민족주의자들의 갈등으로 희생된 우리 민족 근대사의 한 생생한 실화이다. 그 배경을 하나하나 살펴보자.

한국과 남만주는 지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역사적으로 언제나 교섭이 활발하였다. 더구나 일제치하에서는 일제의 착취와 생활의 곤고로 만주나 그 너머 시베리아 땅을 찾아 떠나는 이민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독립운동, 특히 무장독립운동이 과격해서 일제의 군사적 대응이 극심하였기에 우리 동포들의 환난은 잠잘 날이 없었다.

우리교회는 그들의 아픔과 고난을 외면할 수 없어서 그들을 전도하면서 그들의 생활 안전을 위한 노력 또한 쉬지 아니하였다. 하지만 거기 따른 환난과 핍박도 우리 교회 역사를 피로 물들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만주와 그 너머 시베리아에 관련된 우리 교회의 피눈물 나는 역사와 문학이 줄을 잇고 있다. 총회록이나 연회록에 그런 사건들이 즐비하여 눈물 없이 읽어 내려갈 수가 없다. 이광수나 박계주, 임옥인, 박종화, 안수길 그리고 전영택의 문학들이 그 대표적인 것들이다.

한경희 목사는 1914년 평양 장로회신학교 졸업 이전부터 남만주 전 지역 여러 곳을 순회하며 전도한 남만주 전도의 대사도였다.

 

 더구나 그는 가는 곳마다 우리 겨레들의 비참한 살림을 목격하고는 농민공사, 기독교협진회, 농무조합, 한족동향회 등을 조직하여 생활안전이라든가 우리 겨레들의 단결에 힘을 기울였다.

그러다 보니 자연 민족주의를 고취하게 되었고 그래서 일경의 요시찰 인물로 항상 미행당하는 처지였다. 실제로 1924년 그는 장로교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얼마동안 고생하였다.

 

그러다가 1928년에 다시 체포되어 신의주 법원에서 3여 년의 징역 선고를 받고 옥고를 치렀다.

그런데 그런 아픔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 그의 가족에겐 또다른 비극이 시작된다. 그의 맏아들 한청옥이 민족주의자가 쏜 총을 맞고 죽게 된다. 한청옥은 아주 악명 높은 공산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만주의 관동군관학교를 졸업한 과격 공산주의자로, 한때 교회의 영수 일과 학교의 교감 일까지 보았던 인물이다.

 

 

 한경희 목사는 출옥 후 한 1년 동안

의산노회의 창성교회에서 목회하였다.

그러나 그는 결국 다시 만주로 되돌아간다.

 

 


만주의 사도 바울 한경희 목사

저자
이학인, 김만수 공 지음
출판사
기독교연합신문사(UCN) | 2005-04-15 출간
카테고리
종교
책소개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한국기독교사를 공부한 김만수 목사의 노고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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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의 동포들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33년 겨울, 총회 전도부 파송 목사로 다시 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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