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개신교회의 초기역사는 일반의 침략사와 때를 같이한다. 이땅에 설립된 교회는 이땅 민족과 고난을 함께 해야한다.
일본은 교회의 성장을 경계의 눈으로 바라본다. 반일 운동의 지도자의 상당수가 기독교인이었다.
기독교가 반일 운동의 중심이었기에 교회와 우호관계를 맺고 자기의 목적대로 교회를 움직이든지 아니면 강압으로 교회를 누르든지 해야했다. 결국 교회와 같이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핍박을 가한다. 선교사들은 강대국 출신들이기에 함부로 건드리지 못했다. 한때 선교사들의 이해와 환심을 사려했다.
조선 선교사들을 이또 히로부미는 칭송을 하기도하고 회유책을 쓴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선교에 대해서 희망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이런 희망은 실망으로 바뀐다. 1909년 이또가 안중근에게 사살을 당한 후에 데라우찌가 조선에와서 한일 합방조약을 체결하고 초대총독으로 절대권을 행사한다.
그는 일본 불교도로서 기독교에 대해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탄압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서도 그 탄압이 이어진다. 그러는 가운데 일본인들의 음모와 심한 박해에 의해서 몇 가지 사건이 발생한다.
1) 안악사건 - 교육총회사건: 조선 서북부지방은 기독교의 성장이 가장 빠른 곳이었다. 여기에는 신민회와 교회지도자들의 활동이 가장 활발한 곳이었다. 평북, 황해도의 안악지방등은 일제가 경계를 늦추지 않은 사찰지역이었다. 안악지역 교회의 지도자들은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통해서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위 해서 일면 일교운동을 전개하고 교육총회를 만든다. 안중근의 아우 안명근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서 반출하다가 체포됨으로 교육운동의 박해에 빌미를 주게된다.
이때 김구등이 체포되고 수난을 당한다. 1915년에 전후해서 출옥을 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계속 감옥생활과 유배를 당한다. 여기서 이 운동을 억누르는데 성공한 일제는 평안에서도 계속한다.
2)105인 사건
1910년 평안도 지역에 기독교 세력을 억누르기 위해서 한 사건을 조작해서 기독교인들을 투옥하고 선교사들을 추방함으로 1910년 12월 17일 압록강 철교 준공식에 데라우찌가 참여하러 갔는데, 기독교인들이 이 데라우찌를 암살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16명이 정주에서부터 선천까지 따라왔지만 이 일을 이루지 못했다고 조작을 한다. 선교사들이 이일을 하는데 모의와 격려를 했다는 것이다.
당시 선교사들은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키고 있었지만, 일본사람들은 교회를 자기들의 장애물로 보았기 때문에 그들도 또한 장애물로 여겼다.
이 때의 사건은 경찰이 날조한 것이다. 이 때 체포된 숫자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전득기 목사등은 이 때 고문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재판을 받았는데 105명이 기독교인이었고 97여명이 장로교인들이었다. 67명이 정주사람들이었다. 윤치호 등이었다. 재판에 있어서 제출된 공소장은 고문에 의해서 날조되어 쓰여진 것이었다. 재판과정에서 날조된 것이 드러났지만, 재판장은 이런저런 구실을 붙여 유죄판결을 내린다.
판결문에서 "이것은 신민회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이지만, 대부분 야소교의 유력자들이다......" 그들은 교회의 세력을 파괴하려고 한 것이었다.
형을 받은 사람들은 여러차례 감형이 되었다. 1915년 2월까지 다 풀려나게 된다. 기독교와 일본사이의 첨예한 대립이 생기는 것을 보게된다. 총독부는 포교를 법을 통제하면서 음으로 양으로 교회를 탄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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