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연구소/교회사 연구소

부산 경남지방의 선교

by 산골지기 2015. 7. 29.
728x90

부산 경남지방의 선교

부장로교의 부산지역의 선교
1891년에 시작을 했다. 처음에 부산에 배위량목사가 선교사로 왔다. 후에 평양신학교 교수로 있었다. 물론 1889년에 개인 선교사가 왔지만 이년뒤 떠났다.

 

특히 부산에는 두곳의 선교ststion이 있었다. 좌천동에 호주 선교회, 염주동에는 미 북장로교의 선교 station이 있었다. 미 북장로교를 통해서 전도가 이루어지고 1894년에 초량교회가 최초로 설립되었다. 배위량(Baird) 선교사는 부산의 선교기지를 마련한 후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경상도 북부지방에 관심을 가지고 낙동강을 따라서 대구까지 갔다. 그는 1895년까지 부산에서 선교활동을 하다가 서울로 이동을 한다.

그후 1895년에 Adams가 왔다. 이년을 봉사한다. 그가 올 때 3개월이었던 그의 아이는 안두완 선교사이다. 대구에서 활동을 했다. 북장로교 선교부가 부산에 기지를 마련하고 일을 했지만, 이미 호주 선교사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 효과상 이들이 협의해서 북장로교 선교회가 모든 것을 호주장로교에 양도를 하고 부산으로부터 완전히 철수를 한다.
강북은 북장로교가 강남은 호주 장로교가 맡았다.

1891년 데이비스 목사가 부산에 와서 세상을 떠났다. 도착한 후 6개월 뒤의 일이었다. 이것으로 호주 장로교회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부산 선교에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호주 빅토리아 지역의 장로교회들이 주축이 되었다. 그리고 데이비스 목사가 죽은 그해 10월에 Mackay목사 가족과 세여자를 파송했다. 그들이 도착했을 때 무서운 추위가 찾아왔다. 한 겨울을 지나고 나서 그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까지 배위량 목사가 부산에 있었다. 배위량 목사도 단칸방에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받아줄 수도 없었다. 그리고 매케이 목사의 부인이 삼개월 뒤 병으로 숨진다.

 

그리고 세명의 여자중 한 명과 결혼을 하고 자리를 잡았지만, 1893년 8월에 고향으로 돌아가야만 했다. 결국 호주 선교회에서는 이 일들을 인하여 교회는 큰 자극을 받고 다시 사람을 보낸다. 1894년 5월에 애담슨 목사를 부산에 파송한다. 부산에 와서 일을 하면서 거제도 마산등지에서 전도를 한다. 부산에서 얻은 그들의 첫 신자는 맨지스양에게 한글을 가르치던 심서방이었다. 1893년에 배위량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애담슨 목사가 부산에 도착했을 때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기를 원하는사람이 24명이 있었다. 그리고 그후 약 60여명이 정기 집회에 참여했다. 1900년에 왕길지 목사가 왔다. 2개월 후 장년 41명 유아 61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이것은 한국 굫개혁주의적인 성격을 띤 교회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먼저 있었던 교인들을 중심으로 1901년에 부산진 교회가 설립된다. 부산에는 초량교회, 부산 진교회가 있었다.

반응형

'연구소 > 교회사 연구소'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산과 대구 선교  (0) 2015.07.31
일본식민정치 이후의 교회  (0) 2015.07.29
개신교 선교사들의 입국  (0) 2015.07.29
개신교 선교운동의 개척자들  (0) 2015.07.29
개신교의 한국전래의 배경  (0) 2015.0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