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일, 대구 북방의 방어선을 뚫기가 쉽지 않다고 판단한 때문인지 유학산 일대에 포진해 있던 북한 15사단이 돌연 영천 방면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북한군 3사단과 13사단이 대구 북방에 여전히 남아 공세를 지속했지만, 8월 중순 때만큼 기세를 올리지는 못했습니다. 마침내 북한군의 공격력이 약화된 것입니다.
국군으로서는 당시 다부동의 위기가 고조되고 있을 때였으므로 다행스러운 일이었습니다. 8월 21일부터 국군 제1사단의 전황은 점차 호전되어 갔고, 이날 밤 다부동에서는 한국전쟁 최초로 전차전이 전개되었습니다.
다부동 계곡에서 국군과 미군,
북한군의 전차포에 의해 발사된 철갑탄이
5시간 동안이나 교차되면서 교전을 치렀습니다
마침내, 8월 22일 국군 1사단이 유학산을 탈환하였습니다. 제1사단은 주 저항선을 안정시켜 작전의 주도권을 행사하게 되었으며, 이에 따라 미 제27연대는 증원임무에서 해제되어 마산의 모체부대로 복귀하게 되었습니다.
북한군은 전투력이 크게 약화되었고, 북한 인민군 제13사단은 유학산에서만 1,500명이 전사상되고 총 3,000명의 손실을 입었습니다.
다부동전투는 ‘제자리에서 버티든가, 아니면 죽는’ 식의 처절하고 살벌한 싸움이었습니다.
당시 남한이 사실상 대구와 부산을 중심으로 한 영남 중남부지역에만 간신히 발을 걸치고 있던 상황이었던 만큼, 단 한 차례만 방어선이 뚫려도 대한민국의 국운 자체가 위태로울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미국 장교 중 일부는 한국 본토가
모두 북한군에게 점령되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
‘뉴 코리아(New Korea)’라는 이름의 망명 정부 수립 계획까지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