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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여기자는 최은희이다.
1924∼1931년 조선일보 기자·학예부장을 지낸 그는 1927년 근우회(槿友會) 중앙위원, 1948년 대한부인회 서울시부회장, 대한여자국민당 서울시당수(1962), 한글학회 지도지원(1971), 3·1국민회의 대표위원(1971∼1973), 3·1운동여성참가자봉사회장(1981) 등을 역임했다.
최은희
일제강점기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벌인
여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 최초의 방송아나운서를 지냄
3·1만세운동이 있기 하루 전인 2월 28일 저녁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최은희는기숙생들과 통학생들에게 이 사실을 모두 알렸고, 여학생들은 온종일 시가를 누비고 다니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저녁 무렵 최은희는 동료 32명과 헌병에 체포되어 남산 경무 출감부로 끌려갔는데 30명은 훈방 조치되고 최은희와 최정숙은 죄질이 무겁다고 감방 신세를 져야 했다.
3월 27일 풀려나 황해도 배천(白川) 고향으로 내려갔는데
최은희
1927년 근우회 중앙위원으로 활동
고을에 나타난 최은희가 도화선이 되어 형부인 송흥국을 비롯한 마을 청년들이 태극기와 안내문들을 만들어 만세운동을 펼쳤다.
그 일로 또 다시 6달의 징역살이를 하고 이후 동경유학길에 오른다.
동경유학기간 최은희
한복을 즐겨 입었고, 당시에 동경에서 한복차림은 “죠센징짱골라”라는 소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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