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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근현대사180

강화도 조약 강화도 조약에는 조선은 부산 이외에 두 곳의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이 와서 통상하는 것을 허가한다. 일본인이 조선의 해안을 자유롭게 측량하는 것을 허가한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당시 개항을 하기로 약속한 항구는 부산과 원산, 제물포였습니다. 이중 가장 늦게 개항된 항구는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제물포였습니다. 제10조 조선의 항구에서 죄를 지은 일본인은 일본 관리가 심판한다는 내용이 일본의 치외법권인정에 대한 내용이죠. 당시 서양세력들은 근대적인 조약을 맺을때에 치외법권인정을 매우 중요시하였습니다. 1876년에 체결된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체결한 최초의 근대적 조약인 동시에 불평등 조약이라고 할수가 있습니다 2016. 8. 11.
독립협회의 대표적인 인물 독립협회의 대표적인 3명의 인물은 서재필과 이상재, 윤치호이다. 이상재와 윤치호는 이후 YMCA에서 많은 활약을 하게된다. ​ ​모두 기독교인이라는 점도 공통적이다. 독립신문을 창간한 서재필 독립신문--- 서재필이 창간한 최초의 한글신문 2016. 8. 6.
대한제국 군대 해산 대한제국 군대 해산이란, 1907년 7월 31일 밤, 대한제국 순종 황제가 군대해산을 명하는 조칙을 내려 군대를 해산했다고 알려진 사건이다. 서울의 군대를 시작으로 하여, 8월 1일에서 9월 3일에 걸쳐 대한제국의 군대가 해산되었다. 후에 순종 황제의 조칙이 이토 히로부미와 이완용에 의해 위조된 것이라고 밝혀졌다. 1907년 7월 24일 한일 신협약이 체결되었을 때에 첨부되고 있던 비밀각서에 의거해 이토 히로부미와 하세가와 조선군 사령관은 조선군의 화약과 탄약고를 접수하게 한 다음, 7월 31일 순종으로 하여금 군대해산 조칙을 내리게 하였다.이어서 8월 1일 서울에서부터 군대해산을 결행하였다 2016. 7. 31.
보빙사와 근대 학교의 시작 근대학교 설립을 처음으로 제의한 인물은 민영익이었는데 1883년에 미국에 보빙사로 갔다가 돌아온 후 근대 문명을 보급하기 위하여 근대학교를 설립할 것을 제의하였다. 보빙사 수행원으로 민영익과 함께 미국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온 홍영식과 서광범 등도 근대학교 설립에 적극적으로 찬성을 한다. 이에 따라 관립 근대학교인 육영공원의 설립이 본격적으로 추진이 되게된다. 1886년 9월 23일에 육역공원 개교. 육영공원 설립을 추진하던 1884년에 갑신정변이 일어남에 따라 육영공원의 개교는 지연되게 되었는데 1년후 미국측에 요구한 3명의 교수요원이 도착한 1886년 9월 23일에 육역공원이 개교를 하게된다. 설립당시 육영공원의 학생정원은 35명이었고 교수들은 모두 미국에서 초빙한 인물들이었는데 모두 크리스트교 선교사들.. 2016. 7.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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