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우리 역사/조선218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 홍경래 홍경래는 《조선왕조실록》에 역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는 세도정권의 부패, 삼정(三政)의 문란 등 조선 후기의 사회적 모순에 저항해 농민 반란을 일으킨 인물로 일반 백성들에게는 전설 속의 영웅이며 민중의 지도자였다. 백성들은 그가 언젠가 다시 돌아와 자신들을 고통에서 구해 줄 것으로 믿었다. 그의 사후 그를 흉내 낸 크고 작은 봉기가 잇달아 일어나는 등 홍경래는 수많은 농민봉기에 영향을 주었고, 조선 후기 사회 변화의 기폭제가 되었다. 서른세 살의 짧은 생에도 역사 속에 엄청난 삶의 자취를 남긴 셈이다. 홍경래는 몰락한 양반 가문 출신으로 평안남도 용강군 다미면에서 태어났다. 외숙부인 유학권(柳學權)에게 글을 배웠는데 어렸을 때부터 힘이 세고 총명해서 동네에서는 이름난 소년이었다. 유학원은 그의 .. 2016. 10. 19. 순조 순조는 정조 14년(1790) 6월 18일 창경궁 집복헌에서 정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박준원의 딸 수빈이다. 정조 24년(1800) 정월 왕세자에 책봉되고, 6월 정조가 승하하자,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니, 대왕대비 정순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다. 1801년 대왕대비는 공노비를 혁파하고 서얼유통을 시행하는 한편 정조 때부터 집권해오던 시파(時派)에게 보복하기 위해서 사교금압이라는 명분으로 200명의 천주교 신자들을 학살하면서 시파를 모두 숙청하였다. 정조의 유언에 따라 정치에 관여하게 된 안동 김씨가 조정의 요직을 모두 차지하여 전횡과 뇌물을 받는 행위를 일삼았다. 이에 과거제도가 문란해지는 등 정치기강이 무너져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각종 비기와 참설이 유행하는 등 사회혼란이 일어났.. 2016. 10. 18. 정조 정조는 1752년(영조 28) 9월 22일 영조의 둘째 아들인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휘는 산(祘), 자는 형운(亨運)이다. "첫돌이 되었을 때 돌상에 차려진 수많은 노리갯감들은 하나도 거들떠보지 않고 그저 다소곳이 앉아 책만 펴들고 읽었다."라고 할 만큼 어려서부터 학문을 사랑했다. 1762년(영조 38), 정조의 나이 11세 때 생부인 사도세자가 영조에 의해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했다. 정조는 울면서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지만 이성을 잃은 영조는 물론이고 집권 세력인 노론들은 그런 정조를 외면했다. 사도세자가 죽자 정조는 영조의 큰아들 효장세자에게 입적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마음속으로 언제나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잊지 않았다. 엄격한 영조 그리고 자신에게 등을 돌린 외척과.. 2016. 10. 14. 5군영 5군영은 훈련도감·어영청·총융청·금위영·수어청을 가리킨다. 훈련도감·어영청·금위영은 도성을 직접 방어했으며 총융청·수어청은 서울의 외곽을 방어했다. 훈련도감은 임진왜란 당시 직업군인인 삼수병 중심으로 편성되었는데 임진왜란 이후에도 중앙군의 핵심군대로 자리잡았다. 어영청·총융청·수어청은 인조반정 후 서인정권의 무력기반 강화와 청나라의 위협에 대한 방어책으로 신설되었다. 어영청은 인조말~효종초에 확대되었고 총융청은 이괄의 난을 계기로 설치되었으며 수어청은 1626년 남한산성을 수축하고 이를 중심으로 경기도 남방을 방어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1703년 훈련도감을 중앙에 두고 양익 체제를 갖춘 3군문 체제를 형성하여 총융청과 수어청은 3영으로 통일·재편되었다 2016. 10. 9. 이전 1 ··· 27 28 29 30 31 32 33 ··· 55 다음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