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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조선218

조선의 외교 조선은 건국 후 명과의 외교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초기에는 명의 부당한 요구로 괴로움을 겪기도 하였지만, 명과의 외교 관계 확립을 통해 국가의 안정을 유지하고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기 위해 적극적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조선의 외교는 사대교린을 원칙으로 추진되었다. 우선 동아시아의 강대국인 명에 대해서는 큰 나라이자 문명국을 섬긴다는 ‘사대’를 원칙으로 외교 관계를 맺었다. 그 밖에 여진과 일본 등에 대한 외교는 이웃과 대등하게 교류한다는 ‘교린’을 원칙으로 삼았다. 조선은 명과의 외교를 가장 중시하였다. 명과 평화적 관계를 맺는 것이 조선의 안정과 번영에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태조 때 명이 조선과 몽골 사이를 의심하고 조선도 요동 정벌을 준비하면서 갈등을 빚기도 하였으나, 태종 이후 양국 관계가.. 2016. 12. 5.
병인양요 병인양요(丙寅洋擾[1] )는 1866년(고종 3년)에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병인박해)을 구실로 삼아 외교적 보호(diplomatic protection)를 명분으로 하여 프랑스가 일으킨 제국주의적인 전쟁이다. 로즈 제독이 이끄는 프랑스 함대 7척이 강화도를 점령하고 프랑스 신부를 살해한 자에 대한 처벌과 통상조약 체결을 요구했다. 흥선대원군은 로즈 제독의 요구를 묵살한 뒤 훈련대장 밑에 순무영(巡撫營)을 설치해 무력으로 대항했다. 조선군이 완강히 저항하자 프랑스 해군은 40여 일 만에 물러났다. 프랑스가 병인양요를 일으킨 진짜 이유는 천주교 박해에 대해 보복한다는 구실로 침범하여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조선의 쇄국정책은 한층 강화되었다. 2016. 12. 1.
장용영 장용영(壯勇營)은 1785년 조선 정조가 만든 호위 군대이다. 대장의 칭호는 장용사(壯勇使)이다. 장 용 영 1785년 조선 정조가 만든 호위 군대 정순왕후에 의해 1802년 폐지 초기에는 장용위(壯勇衛)였으나 1788년 장용영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500여명의 군사를 5대(隊)로 나눠 만들었다. 1793년에는 한양의 내영(內營)과 수원 화성의 외영(外營)으로 나눴다. 다른 군영보다 규모가 컸다. 1795년 다른 군영의 병사들을 편입하여 5사(司) 23초(哨)의 큰 규모로 군대를 편제하였다. 왕권 강화에 큰 역할을 하였으나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왕권이 급격히 약화되면서 당시 대왕대비였던 정순왕후에 의해 1802년 폐지되었다. 2016. 11. 28.
인조반정 인조반정을 일으킨 서인 일파는 지나치게 명분에 집착하였고, 이에 따라 광해군이 추진한 중립외교 정책을 비판하며 구체적인 전략도 없이 무조건적인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한다. 이는 국제 정세의 흐름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행동으로, 결국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인조반정 주체 세력들이 모두 친명배금의 외교정책을 실시한 것은 아니다. 비록 서인들이 광해군의 중립외교정책을 실정의 하나로 지목하여 폐위시키기는 했지만, 이들 역시 명나라의 국운이 기울고 후금이 강성해지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며, 따라서 소수이기는 하지만 실리적 외교정책을 주장하기도 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이귀, 장유, 최명길이다 2016. 11.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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