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728x90

우리 역사/조선218

대동법 대동법(大同法)은 조선 중기인 광해군-숙종 시기에 지방의 특산물로 바치던 공물을 쌀로 통일하여 바치게 한 세금 제도이다. 토지의 결수에 따라 1결당 12두씩을 통일하여 부과하게 되었다. 양반과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혀 본격적으로 실시하는 데 100여 년의 시일이 소요되었다. 토지를 많이 가진 양반 지주들은 부담이 급증하게 되어 이들은 대동법의 시행을 반대하였다. 대 동 법 1708년 제주도,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산 각 지방의 특산물을 바치는 것을 공(貢)이라 하는데, 대동법은 이것을 일률적으로 미곡으로 환산하여 바치게 하는 제도이며, 이때 걷은 쌀을 대동미라 한다. 대동법의 실시를 놓고 논란이 확산되었으며 김육, 김좌명, 김홍욱, 이원익 등의 찬성파 외에 안방준, 김집, 송시열 등의 반대파.. 2016. 12. 13.
조선의 무역 명과 사대의 관계를 맺고 있던 조선은 사신 왕래를 통해 조공 무역을 행했다. 세종 이전가지는 매우 불평등한 관계였지만 세종에 이르러서는 금과 은 세공이 면제되면서 경제적인 교류가 원만하게 진행되었다. 여진과는 ‘진상 숙배’라는 관무역이 행해졌는데 진상(進上: 지방의 토산 물 등을 바침)하면 조선이 회사(回賜 : 되돌려 하사하다)하는 형식의 관무역이 행해졌다. 태종 6년에는 여진족들의 생활에 필요한 소금과 철을 자유롭게 사들이게 하여 변방의 우환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경성과 경원에 무역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두만강 유역의 경원, 경성에 무역소 설치 조선은 여진에게 시라소니, 해동청과 각종 모피 등을 진상 받았고 조선은 여진에게 면포, 베, 모시, 금은, 철기, 농구, 식기나 쌀 각종 곡식과 조미료 등.. 2016. 12. 13.
숙종의 치세 숙종의 치세는 크고 작은 정치 논쟁으로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갑인예송에 이어 남인들이 서인의 처벌 문제로 강온파로 분열되자 허적 등 탁남(濁南)을 지지하였다가, 1680년에 허견 등이 복선군을 추대하려던 음모가 발각되자 남인들을 축출하고 서인들을 등용시켰다. 당시 서인의 김석주가 떳떳하지 못한 수법으로 남인의 박멸을 기도하자, 그 방법이 졸렬하다 하여 같은 서인의 소장파에서 이를 비난을 받았으며, 1683년에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열하게 되었다. 인현왕후를 중심으로 하는 서인과 희빈 장씨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이 대립하였다. 숙종은 용모가 출중한 숙원(淑媛) 장씨를 총애하여, 1688년 소의로 승격시켰다. 이때 인현왕후가 결혼한 지 6년이 넘도록 아이를 낳지 못하자 후궁인 희빈이 낳은 왕자 윤(昀)을.. 2016. 12. 12.
임진왜란 의병 의병의 신분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는 전계층이었는데, 농민이 주력군이었고 의병장은 대개 전직관료·유학자들이었다. 의병은 향촌공동체를 바탕으로 자신의 지역을 지키기 위해 봉기한 부대였다. 따라서 향토지리에 익숙하고 지리에 알맞는 무기와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적은 병력으로 대군과 적대하는 정면충돌보다는 매복·기습·위장 등과 같은 유격전술을 사용하여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의병은 우선 점령당한 하삼도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경상도의 경우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권응수(權應洙) 등이 활약했다. ◈ ◈ 현풍 유생 곽재우 사재를 털어 의령에서 기병하여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의령·삼가·합천·창녕 등을 수복하는 등 경상우도를 보호하여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전라도의 경우 고경명.. 2016. 12. 11.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