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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조선218

폐비윤씨 폐비윤씨는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숙의의 지위에 있다가 공혜왕후가 죽자 왕비로 책봉되었으나 남편 용안에 상처를 내어 폐비되어 사사되었습니다. 아들 연산군 즉위 후 제헌왕후로 추존되었으나 중종반정 이후 삭탈되면서 죽을 당시의 폐서인 신분으로 돌아갔습니다. 사사 당시 윤씨는 친정어머니 신씨에게 세자가 자라서 왕이되거든 피를 토한 금삼을 넘겨줄 것을 유언했고, 이는 후일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의 도화선이 되게 됩니다. 연산군은 자신의 모친이 되는 윤씨를 제헌왕후로 왕비의 작호를 추숭시켰는데 중종 반정이 일어난 후 왕후의 호는 삭탈되었습니다 2017. 2. 20.
거북선 거북선 또는 귀선(龜船)은 조선 시대의 군함이다. 거북선은 판옥선을 기본으로 하여 판옥선의 갑판 위 외형 전체에 뚜껑을 씌운 뒤 나무판[1]으로 덮은 배다. 그리고 이 나무판에는 적병이 못 뛰어오르도록 무수한 송곳과 칼을 꽂았었다. 선수부에는 거북머리를 구조하여 그곳에서 전면부로 화포를 쏘게 했고 선미부에는 거북이 꼬리를 세우고 역시 화포를 쏘았다. 결국 거북선은 완전 무장으로 승조원을 보호한채 안전한 곳에서 앞뒤와 선체 측면의 포문으로 전후좌우 각각 6개씩 화포를 발사할 수 있었다. [2] 조선 수군의 지휘관 이순신이 임진왜란 직전에 건조하여 임진왜란 중 사천 해전에서 첫 출전한 이래 일본 수군에게는 공포의 대명사가 되었다. 조선왕조실록등의 기록에는 거북을 한자로 옮긴 귀선(龜船)으로 적혀 있다. [3.. 2017. 1. 21.
노량 해전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일본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명나라의 병력과 함께 순천왜성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를 공격한다. 이것이 순천 왜교성 전투이다. 6차례에 걸친 전투에서 큰 전과를 세운 조선 수군은 일단 고금도로 귀환한 후, 고니시 유키나가의 퇴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유키나가의 병력은 더욱 궁지에 몰리게 되었고, 사천 선진리성에 주둔 중이던 시마즈 요시히로와 고성에 주둔 중이던 다치바나 무네시게, 남해에 주둔 중이던 소 요시토시 등은 고니시 군을 구출하고 본국으로의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그해 12월 15일(음력 11월 18일) 수군 6만여 명과 500여 척의 함선을 이끌고 노량으로 향했다. 그러나 시마즈 함대가 노량을 통과할 것을 예측한 이순신은 명 수군 도독 진린으로.. 2017. 1. 14.
조선의 역사 조선의 역사는 크게 전기와 후기로 나뉘며, 전기를 다시 둘로 나눠 전기와 중기로 보아 전기-중기-후기로 보기도 한다. 이때 전기-후기를 나누는 기준은 임진왜란이며, 전기-중기-후기를 나누는 기준은 전기와 중기는 중종반정, 중기와 후기는 임진왜란 또는 병자호란이다 14세기 말 당시 한반도를 지배하고 있던 나라 고려는, 안으로는 기존의 귀족 세력인 권문세족과 그에 반발하는 신진 사대부들이 대립하여 정치가 혼란하였고, 밖으로는 홍건적과 왜구의 약탈과 원나라에서 명나라로 이어지는 원명교체기의 혼란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 무렵 고려의 북방에서 이성계는 이민족의 침입을 여러 차례 물리치고 명성을 얻어 중앙 정계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 무렵 고려 조정은 철령위 문제로 밖으로는 명나라와, 안으로는 친원파.. 2017.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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