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북장로회와 감리회가 선교사 파송을 결정하는 동안 영국성공회도 한국 선교에 관심을 가졌다.
1884년 중국의 주교들이 성공회 본부에 한국선교부 개설을 요청하기도 했고,1885년 말에는 중국의 성공회 선교회에서 두명의 중국인을 부산에 파송하기도 했다.
동아시아를 담당하던 울프 주교는 1887년 우리나라를 방문,
부산에서의 선교활동을 시찰한 후
성공회 본부에 선교사 파송을 강력하게 요청했다.
영국성공회는 1889년
코르프 신부(한국명 고요한)를
초대 한국주교로 서품해 파송했다.
코르프 신부는 7명의 선교사들과 함께 1890년 9월 인천에 도착했다.
코르프 신부는 한국 선교에서 토착화 선교정책을 펼쳐 한국의 건축양식을 교회건축에 도입하고,한국 문화를 대폭 수용하는 양태로 나타났다.
울프 주교의 편지는 호주에도 전해졌다.이 편지는 호주의 한 선교 잡지에 실렸다.
이 글을 읽은 호주장로교회 데이비스 목사와 그 여동생 메리 데이비스가 한국 선교를 결심,1889년 10월 서울에 도착했다.데이비스 남매는 부산에서 사역하기로 하고 부산으로 가던 중 1890년 4월 데이비스 목사의 병사(病死)로 꽃을 피우지 못했다.
데이비스 목사의 죽음은 호주에서 한국선교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호주 장로교회는 1891년 10월 맥케이,멘지스,파세트,페리 선교사들을 한국선교사로 파송하면서 본격적인 선교를 시작했다.
미국 침례회 계통의 선교회인 엘라딩기념선교회는 1895년 폴링과 가들라인 선교사를 파송,부산과 공주지역에서 활동을 시작했다.미국의 남장로회와 남감리회도 각각 1892년과 1895년 한국선교를 시작했다.
남장로회는 언더우드의 선교보고와 유학 중이던
윤치호의 강연으로,남감리회의 선교는
윤치호의 적극적인 설득으로 이뤄졌다.
캐나다장로회도 1898년 공식적인 선교를 시작했다.
그러나 캐나다인의 선교는 1888년 개인 자격으로 입국한 게일 선교사로부터 시작됐다.1889년 펜윅이,1890년 하디 선교사가 내한했다.1893년에는 맥켄지 선교사가 입국,황해도 소래에서 한국인과 동화돼 선교활동을 하다 1895년 병사했다.
소래교인들은 캐나다교회에 후임 선교사를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고,캐나다교회는 1898년 그리어슨과 맥레 푸트 선교사들을 공식 파송했다.
이 후에도 1907년 성결교회의 모체인 동양선교회가,1908년 구세군이 각각 한국 선교를 시작했다.
1945년 이전까지 내한해 활동한 선교사 수는
약 1천5백30여명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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