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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교회사 연구소

의료선교와 근대학교

by 산골지기 2015.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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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근대식 병원과 학교는 1885년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그 기틀은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만들어졌다.병원과 학교로 시작된 기독교의 간접 선교방식은 주효했다.

의료혜택을 받은 사람들은 서양인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고,서양문물을 받아들여 출세하려는 사람들이 근대 교육시설로 모였다.1886년 이후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도 만들어졌다.선교사들은 이를통해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했다.

1885년4월 시작된 제중원은 매일 1백여명의 환자를 진료했다.

 

 

알렌의 1886년 사역보고서에 따르면 고열병 환자 1천1백47명,소화기계통 환자 2천32명,생식기계통 환자 1천9백2명,부인병 환자 1만4백60명 등 1년동안 모두 2만5백29명의 환자를 치료했다.

 

환자들은 왕족과 양반으로부터 거지에 이르기까지 모든 계층을 망라했다.

1885년5월 입국한 감리회 의료선교사

 

 스크랜턴도 알렌의 부탁으로

 

제중원에서 일했다.

 

한달 후 장로회 의료선교사 헤론이 합류했다.스크랜턴은 제중원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일본에서 만난 박영효의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서 할 일은 얼마든지 있습니다.우리 백성들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교육과 기독교입니다”

박영효는 불안한 정치상황과 힘을 잃은 재래종교 상황,백성들이 겪는 고초에 관해 설명했다.갑신정변에 실패하고 망명중이던 박영효의 말은 신뢰할만했다.

스크랜턴은 제중원에서 일하면서 조선 왕실의 도움을 받지 않는 독자적인 병원 설립을 계획했다.그러다가 9월에 자신이 미국을 떠나올 때 소포로 보낸 의료기구들을 전달받게 됐다.스크랜턴은 제중원에서 나와 9월10일 정동 자신의 집에 진료소를 차렸다.

스크랜턴의 진료소에는 평민들이 많이 찾아왔다.그의 보고서에 따르면,환자들중에 극빈자들이 많았고 종종 버림받은 사람들도 돌봐줬다.진료소에는 1885년 말까지 2백50여명의 환자들이 다녀갔다.환자들이 많아지자 자연히 더 넓은 공간이 필요했다.스크랜턴은 우선 이웃해 있는 땅과 집을 더 사들였다.1886년6월 환자대기실과 사무실,약국,수술실,입원실 등을 갖춘 병원을 마련했다.여자들을 위해 별도의 집을 구입,여자입원실도 꾸몄다.이런 일들이 왕실에 알려졌고,고종은 1887년 이 병원에 `시(施)병원'이라는 이름을 지어 하사했다.조선 왕실의 인정을 받은 것이다.

스크랜턴은 1894년 더 많은 민중을 만나기 위해 시병원을 남대문 근처 빈민지역인 상동으로 옮겼다.상동으로 옮긴 시병원은 약국을 개설하면서 전도하기 시작했고,직원들의 예배가 발전해 지금의 상동교회로 성장하게 됐다.시병원은 첫 민간의료시설이었다.

`학교 사업이라든가 학생들의 자질,성실성을 종합해볼 때 학교의 효율성과 가치는 교회나 선교회에 보람을 줄 뿐아니라 한국을 복음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샤록스 선교사,1901년 선교보고서)

1885년 어느날 정동진료소로 스크랜턴을 찾아온 두 사람이 있었다.그들은 스크랜턴이 제중원에서 일하던 시절에 알게 된 청년들로 의사가 되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었다.이들은 스크랜턴에게 의사가 될 수 있는 방법을 물었고,스크랜턴은 이들에게 우선 영어를 배워야 한다고 알려줬다.그리고 이들을 아펜젤러에게 소개했다.


아펜젤러는 1885년8월3일 의사를 꿈꾸는 청년

 

 이겸나와 고영필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학교사업을 시작했다.

 

그는 또 1885년11월 미국공사 폴크를 통해 학교설립 허가를 얻었다.

학교를 개설하자마자 학생들이 찾아오기 시작했다.학생들은 모두 벼슬을 얻기 위해 영어를 배우려 했다.1886년6월,6명의 학생이 있었지만 9월에는 단 1명의 학생만 남았다.그런데 10월이 되자 학생들이 몰려왔다.재적인원 20명에 18명이 출석했고,학교는 거의 매일 입학을 신청하는 학생들로 붐볐다.

`오늘 선교부 학교이름을 국왕으로부터 하사받았다.배재학당이다'(1887년2월21일 아펜젤러의 일기)

아펜젤러는 이를 정부의 승인으로 받아들였다.또 국립학교는 아니더라도 공립학교가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배재학당은 1887년9월 새 교사(校舍)의 준공식을 가졌고,기숙사 시설도 갖추게 된다.교훈도 마태복음 20장27~28절에 따라 `욕위대자 당위인역'(欲爲大者 當爲人役:크게 되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부림을 받아야 한다)으로 정했다.

배재학당의 선교적 역할도 결실을 맺었다.감리회의 첫 수세자가 배재학당 학생이었던 것.1887년7월 박중상이,10월 한용경이 성경을 읽거나 학교 예배에 참석하면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아펜젤러가 학교사업을 시작할 때 언더우드는 제중원의 영어교육과는 별도로 고아원 형태의 교육사업을 시작했다.언더우드는 1886년5월 정동에 한옥을 구입,수리하고 1명의 학생으로 학교를 시작했다.이 학교는 언더우드학당 예수교학당 민로아학당 구세학당 등으로 불리다가 1905년 경신학당으로 정착,현재의 경신학교로 발전하게 됐다.

1886년5월 스크랜턴 부인은 김씨부인이라는 어느 관리의 첩을 가르치면서 이화학당을 열었다.

이같은 의료와 교육사업은 기독교 선교에 매우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그후에 들어온 대부분의 선교사들도 지방에서 병원과 학교를 설립하면서 선교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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