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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교회사 연구소

조직교회의 시작

by 산골지기 2015. 8.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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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9~10월 서울 정동에서 두 개의 초기 교회가 시작됐다.두 교회는 선교사들에 의해 조직됐지만 선교사들의 열매로만 시작된 것은 아니었다.성경을 먼저 읽고 기독교신앙을 갖게된 사람들에 의해 시작됐다.

 

 



`서울에 도착한 날 저녁,나는 아주 감명깊은 일을 목격했다.해는 이미 기울어 도시는 캄캄했다.그때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그리고 동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넓고 어두침침한 중심가를 지났다.한국사람이 초롱을 들고 우리를 인도했다.조그만 골목길을 지나 넓직한 마당으로 들어섰다.곱게 종이를 바른 문이 열렸다.안으로 들어가니 깨끗한 옷차림에 학식있어 보이는 14명의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로스 목사의 1887년 보고서).

1885년 입국한 선교사들은 거의 1년동안 의료와 교육사업을 시작하는 데 주력했다.종교집회는 여전히 제한되고 있었다.선교사들은 한국인을 만나기 위해 병원과 학교에 관심을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1885년 말 노도사(魯道士)로 알려진 노춘경이란 사람이 헤론의 어학선생을 찾아왔다.서울 근교에서 기독교를 배척하는 문서를 읽고 기독교의 실체를 알기 위해 선교사들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헤론의 어학선생은 언더우드를 소개했다.그러나 그는 언더우드의 서재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았다.경계심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노도사는 1886년 초 다시 어학선생을 찾았다.하지만 어학선생은 알렌의 통역사로 자리를 옮긴 후였다.어학선생을 만나기 위해 노도사는 알렌의 집으로 찾아갔다.그 집에서 노도사는 한문으로 된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을 발견하고,몰래 집으로 가져와 읽기 시작했다.

 

노도사는 쪽 복음서를 읽으면서 기독교의 진리에 점점 빠져들어 갔고,언더우드에게 성경과 교리서를 계속 빌려서 읽었다.선교사들만의 주일예배에도 몇 차례 참석했다.결국 노도사는 기독교신앙을 갖기로 결정,교리문답을 거쳐 1886년 7월18일 세례를 받았다.국내에서는 최초의 세례식이었다.세례식은 언더우드가 집례했고 아펜젤러가 보좌했다.

선교사들은 `첫 열매'를 맺은 데 대해 매우 기뻐했다.전도를 해서 얻은 열매가 아니라 스스로 복음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더욱 감격했다.게다가 세례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한두명 더 있다는 노도사의 말에 무한한 선교 가능성을 발견했다.선교사들은 제중원과 시병원,배재학당과 고아원에 더욱 정열을 쏟았다.

 


1886년 3월 말에 중국성서공회 총무인 브라이언트 목사가 서울을 방문했다.선교사들은 그에게서 서상륜이란 이름을 들었다.

브라이언트 목사는 서상륜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수소문했지만 찾지 못하고 매우 실망해 중국으로 돌아갔다.브라이언트는 중국으로 되돌아간 후에야 언더우드에게 서상륜을 만났다는 편지를 받게 된다.

서상륜은 세례지원자 몇 명과 함께 언더우드를 찾아갔다.

 

세례지원자는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이들은 교리문답에서 목숨도 아깝지 않다는 고백을 했다.

 

서상륜은 언더우드에게 고향인 황해도 소래로 내려가서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했다.그러나 언더우드는 소래로 갈 수 없었다.선교사들이 여행을 할 수 없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서상륜은 1884년 13명,1885년 79명의 신자를 얻었다고 말하면서 사람들을 데려올테니 세례를 베풀어달라고 말했다.

그것을 시작으로 선교사들은 찾아오는 지원자들에게 계속 세례를 베풀었다.1887년 9월 초까지 모두 11명의 소래사람들이 세례를 받았다.


언더우드는 1887년 9월27일

 

 자신의 집에서 최초의 교회를 조직했다.

 

이 자리에는 마침 신약성서 일로 서울을 찾아온 로스 목사도 함께했다.이날 모임에서 두 사람이 장로에 장립됐다.이 교회는 1895년까지 정동교회로 불리다가 1907년 서울 신문로로 옮긴 뒤 `새문안교회'로 불리기 시작했다.서정민씨(연세대 강사)는 새문안교회에 대해 한국장로교회의 모(母)교회로 기독교 사회문화 영역의 중심지이자 민족청년운동의 요람지로 선도적인 역할을 감당해 왔다고 평가했다.

로스 목사에 따르면 새문안교회 조직 당시 서울에는 이미 3백여명의 지원자가 있었다.이들은 공개적으로 교회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언더우드의 1888년 보고서에는 `누가 봐도 교회는 나날이 성장하고 있다'며 `사방에서 한국인들이 세례를 베풀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지만 학교일 때문에 갈 수 없다'고 씌어있다.

 

서상륜을 비롯해 만주에서 파송된 성서판매인들과 국내 선교사들이 채용,파송한 성서판매인들의 적극적인 전도 덕분이었다.

 아펜젤러는 배재학당에서 선교했다.

 

1887년 6월 배재학당 학생들중 기독교에 관심을 갖고 개인적으로 기독교를 배우는 학생들이 있었다.

 

이들중 박중상이란 학생이 1887년 7월24일 아펜젤러에게 세례를 받았다.박중상은 배재학당에 들어오기 전에 일본을 다녀왔고,그 곳에서 기독교를 알았던 것으로 전해졌다.

 

10월2일에는 한용경이란 학생도 세례를 받았다.한용경도 한문성서를 읽어 이미 기독교를 알고 있었다.

아펜젤러는 10월9일 성경공부를 위해 따로 마련한 건물에서 한국인 교인 4명과 함께 첫 예배를 드리고 베델교회를 시작했다.1주일 뒤에는 성서판매인의 부인에게 세례를 줬다.첫 여성 수세자였다.

 

아펜젤러가 세운 베델 교회는

 1897년 서울 정동에 교회당을

짓고 `정동제일교회'로 이름을 바꾸었다.

 

서정민씨는 정동교회에 대해 “전통적 복음성을 확립하고,그 위에 한국적인 신학,신앙체 참여노선 등 민족신앙적 토대를 마련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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