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4월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뎠다.상주(常駐) 선교사로 파송된 것.아펜젤러 목사는 부인의 건강 때문에 곧 돌아갔다.하지만 독신인 언더우드 목사는 서울로 향했다.마음 속에는 이 복음의 불모지를 갈아 씨를 뿌려야 한다는 사명감과 기대가 가득차 있었다.
그런데 서울로 들어선 언더우드 목사는 깜짝 놀랐다.이미 한글로 번역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이 사람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기 때문이었다.자신도 입국하기 전 우리말로 번역된 마가복음을 한국인으로부터 전해받아 놀라고 있던 터였다.선교사들에 의해 전도가 시작되기 전 피선교국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된 사례는 선교역사에서 매우 드문 일이다.
언더우드가 입국 2년 뒤 첫 교회를 조직할 때도 그 구성원은 이미 서울에 있던 신앙공동체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언더우드 목사는 `씨를 뿌려야 할 때 이미 열매를 거두고 있다'고 본국에 보고했다.
1879년 만주.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성경번역자가 세례를 받은 데 이어 백홍준과 이응찬,그리고 이름을 알 수 없는 이응찬의 친척이 거의 같은 시기에 스코틀랜드연합장로교회 소속 존 매킨타이어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백홍준은 도(道)를 배울 목적으로 스스로 로스목사를 찾아가 세례 전 3,4개월 동안이나 성경을 배웠다.이응찬은 1876년부터 존 로스목사의 어학(語學)선생으로 활동하다 수세(受洗)를 결심했다.
성경번역에 참여했던 이들은 이미 1880년 신앙공동체를 이뤘던 것으로 보인다.매킨타이어 선교사의 1880년 보고서에 따르면 1879년 10월 이전에 8명 이상이 모이는 한국인 저녁집회가 있었다.이 집회는 한국인이 주관했다.매킨타이어 선교사는 이 집회의 방청인에 불과했다.
서상륜. 권서인으로서 한국에 성서 배포의 뿌리를 심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1882년에는 성경인쇄 실무를 맡았던 김청송과,상인으로 만주에 왔다가 매킨타이어 선교사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진 서상륜이 로스 목사에게 세례를 받았다.이 때쯤 성경번역도 마무리됐다.1879년 신약성서 로마서까지의 원고가 마련됐고 1882년 `예수셩교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인쇄하기 이르렀다.
성경 인쇄가 성공적으로 끝나자 로스 목사는 첫 수세자들을 파송했다.1882년 김청송이 서간도지역에 파송된 데 이어 서상륜이 대영성서공회 최초의 한국 권서인 자격으로 서울지역에 파송됐다.김청송은 중국 즙안(輯安)을 중심으로 활동해 수십명의 개종자를 얻었다.존 로스 목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1884년 말 수세자 1백명,남자 세례 요청자들이 6백여명에 이르렀다.
즙안의 가정교회들은 1885년 중국인 지주에 의한 한인마을 해산 사건으로 한반도 북부지역의 압록강 인근 산간으로 돌아와 가정교회 형태의 신앙공동체를 이뤘다.
김청송과는 달리 서상륜은 한반도의 중심 서울로 향했다.서상륜은 서울로 오면서 3개월 동안 의주와 황해도 지역에서 전도했다.1883년 초 서울에 도착한 서상륜은 서울 남대문 안쪽에 거처를 정하고 활동해 여러명의 개종자를 얻었다.서상륜은 중국의 로스 목사에게 편지를 보내 서울에 와서 13명의 개종자들에게 세례줄 것을 요청했다.그러나 로스 목사의 입국은 정치적 상황 때문에 불가능했다.결국 이들은 1885년 언더우드 목사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1883년 서울과 북부지방에서 전도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일본에서도 세례를 받는 사람이 나타났다.이수정.민비를 구출한 공로를 인정받아 박영효의 수신사 일행에 포함돼 일본유학을 가게된 인물이다.그는 1883년 5월 도쿄에서 열린 `전국기독교도 대친목회'에 참석,우리말로 기도하고 한문으로된 신앙고백서를 발표하기도 했다.
이수정은 미국성서공회의 지원을 받아 1884년 한문성경에 토를 붙인 4복음서와 사도행전을,1885년 한글로 마가복음서를 번역했다.언더우드 목사가 1885년 4월 제물포항에 내릴 때 손에 들고있던 성경이 바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이었다.그는 또 도쿄에서 유학생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를 조직했다.미국 선교사 헨리 루미스의 1883년 보고서에 따르면 이때 12명 이상의 개종자가 있었고,주일학교도 시작됐다.그러나 만주의 기독교인들과 달리 일본의 기독교인들의 신앙은 지속되지 못한 듯하다.
한국 선교는 서양 선교사가 아니라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먼저 진행됐다.이를 바탕으로 교회도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시작됐다.
일부 교회사학자들은 1885년을 선교 시점(始點)으로 잡는데 이견을 갖고 있다.이때가 첫 조직교회가 생긴 때도 아니고 서양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첫발을 내디딘 때도 아니기 때문이다.1832년 고대도에 `첫발을 디뎠던' 귀츨라프 목사나 1866년 평양 대동강변의 토마스 목사,1884년에 들어온 `상주 의료선교사' 알렌 등이 모두 1885년보다 앞서기 때문이다.
1885년을 선교의 시작으로 보기 힘든 이유는 이때보다 연대적으로 앞선 `밖으로부터의 선교' 행적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우리 민족이 `안에서부터 받아들인 선교'의 자국이 너무 뚜렷하기 때문이다.만주에서 첫 세례자가 있던 때나 소래에서 첫 신앙공동체(교회)가 세워진 때를 시작으로 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연구소 > 교회사 연구소'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조직교회의 시작 (0) | 2015.08.09 |
|---|---|
| 의료선교와 근대학교 (0) | 2015.08.09 |
| 복음의 동방전래 (0) | 2015.08.09 |
| 복음의 씨앗 (0) | 2015.08.09 |
| 헤론 소천 후, 세브란스 병원이 세워지기 까지 (0) | 2015.08.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