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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교회사 연구소

평양 선교

by 산골지기 2015.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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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와 교육을 통해 조심스럽게 복음전도의 길을 모색하던 초창기의 다른 선교사들과는 달리 모펫은 조롱과 야유를 받으면서도 직접 노방전도에 나섰으며 저녁에는 사랑방들을 찾아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모펫 목사가 노방전도를 하다가 후에 회개하고 유명한 목사가 된 이기풍의 돌팔매에 맞아 피를 흘렸다는 이야기는 조선초기선교사상 잘 알려진 에피소드이다.

그는 1893년 평양에 첫 번째 교회인 ‘널다리골교회’를 세웠다. 후에 ‘장대현교회’로 개칭되어 해방후 북한이 강제로 폐쇄할 때까지 서북지역의 대표적인 교회로 성장했다. 그는 특히 조선인 조사들을 앞세워 평북지역에는 김관근, 평남지역에는 한석진, 황해도 지역에는 서상륜을 대표자로 임명하고 ‘팀웍’선교를 시행하면서 교회를 세우고 제자들을 키웠는데 이 지역에 그가 직, 간접으로 세운 교회들이 수없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모펫의 가장 큰 업적은 지도자 교육에 관심을 가지고 기독교 교육에 힘 쓴 것이다.

 

 

 그는 조선인 목사 양성을 위하여 1901년에 김종섭, 방기창을 데리고 신학반을 시작하여 1903년에는 조선 최초의 평양장로교신학교 초대교장이 되었고 1907년에 최초의 졸업생들을 배출하였는데 한국장로교 역사상 처음으로 목사안수 받은 한석진, 방기창, 길선주, 이기풍, 양진백 등이 이 학교 출신들이다.

 

그는 1924년까지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그 후 신사참배문제로 학교가 폐교될 때까지 많은 장로교회 목사들과 여전도사들이 이 학교를 통해 배출되었고 오늘날 서울에 있는 장로회신학대학교의 전신으로 계승되었다.

 

 

그는 장로교신학교 외에도 평양에 3숭(三崇)이라고 불리우는 숭실전문학교, 숭실중학교, 숭의 여학교 등을 세워 젊은 인재교육에 힘썼으며 조선예수교장로회 8대 총회장을 역임한 후 10여년 동안(1919-1928)은 숭실학교 교장으로 시무하면서 일본의 압제에 맞서서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한 인재양성에 전력을 기울였다.

모펫은 조선사람들을  자기민족처럼 사랑했다. 그는 선교여행시에는 조선사람들과 숙식을 갖이하고 사랑방을 돌면서 그들을 사귀려고 노력하였으며 조선의 예법까지도 익히고 특히 한국음식을 즐겨먹었다.

 

모펫은 어디에서나  한국인처럼 친밀감을

느끼게 했는데 이런 모펫을 가리켜

 "마포 목사님"이라고 불렀다.

 

1912년 ‘105인 사건’으로 한국의 애국지사들이 투옥되자, 매큔,·에비슨 선교사 등과 함께 이 사건이 사실무근의 날조사건이며 고문 등 비인도적 방법이 자행되고 있다 하여 당시의 조선 총독 데라우치 에게 항의하였다.

 

또  미국의 장로회 본부에 일제의 만행을 보고하여 국제여론을 환기시키는 데 힘썼다.

 

 

한국의 독립과 발전에도 남다른 관심을 기울였던 모펫은 일본관헌들에 의해 겉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공언하지만 조선의 정치적 혼란을 충동하는 선교사 무리들의 괴수로 지목되었다.

 

 

그는 감시와 박해를 받았지만 용감히 조선민중들의 편에서 일본관원들과 맞서 싸웠으며 해외에 진상을 알리는데 각별한 노력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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