윌리엄 스크랜턴에게 1886년은 계획했던 의료 사역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는 해가 됐다. 제중원과 달리 순수 선교사들의 투자로 설립된 스크랜턴 진료소에는 돈 없고 가난한 민중 계층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대부분 극빈층에 속해 있었고 버려진 사람도 있었다.
스크랜턴이 정동 집 한쪽에 진료실을 마련하고 9개월간 치료한 환자는 522명에 달했다. 앞서 집에서 치료한 환자까지 포함하면 1년간 1000명에 육박하는 환자를 치료한 셈이다.
그런데 1년간 환자에게 받은 진료비는 고작 34달러 84센트였다. 약값도 미치지 못한 돈이었으나 이로 인해 ‘무료 병원’으로 소문이 나서 온갖 환자들이 몰려왔다.
독자적인 병원 부지와 건물 마련이 시급했다. 다행히 스크랜턴은 기대했던 대로 병원 부지를 매입하는 데 성공했다. 새로 마련한 부지는 정동 사택 바로 아래(정동 34번지), 지금의 정동제일교회 문화재 예배당이 자리 잡은 곳이었다.
‘ㄷ’자 형태의 한옥 기와집이 있었는데 내부를 개조해 수술실과 환자 대기실, 사무실, 약제실을 갖춘 병원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1886년 6월 중순 정식으로 병원문을 열었다.
병원 이름은 ‘미국인 의사 시약소’였다. 병원 출입문에 간판을 만들어 붙여야 했는데 어떻게 쓸지 몰라 고민하고 있었을 때 스크랜턴의 어학선생이 자신이 알아서 하겠다며 한문과 한글로 적어왔던 것이다.
시약소 간판은 한쪽 기둥에 걸었고 다른 기둥에는 경고문처럼 ‘남녀노소 누구든지 어떤 병에 걸렸든지 아무 날이나 열 시에 빈 병을 가지고 와서 미국 의사를 만나시오’ 라고 써 붙였다. 빈병 안내문은 물약을 타갈 때 필요했기 때문이다. 처음엔 약을 병에 넣어주었는데 유리병이 귀한 때라 약을 먹은 후 빈 병을 가져오라고 했던 것이다.
그 무렵 서울에는 콜레라가 창궐했다. 거리엔 버려진 환자들이 많았다. 하루는 스크랜턴이 서대문 성벽 근처를 걷고 있었는데 가마니를 뒤집어쓴 여성이 누워있었다. 여성 옆엔 어린 딸까지 있었고 먹을 게 없어 구걸하고 있었다.
스크랜턴은 일꾼을 시켜 환자를 병원으로 데려왔고 3주 후에 그녀는 많이 회복됐다. 환자를 들것에 실어 데려왔던 일꾼들은 스크랜턴의 ‘착한 일’을 소문냈고 그 후 찾아오는 환자는 더 늘었다.
스크랜턴은 질병 치료를 통해 한국인들의 고유문화와 종교, 관습과 정신세계를 알아갔다. 부적을 붙이고 온 환자 같은 경우는 난감하고 당혹스러웠다. 엉뚱한 손님도 찾아왔다. 역병이 물러가도록 하늘에 제사를 지내야 한다면서 제사비용을 내라고 요구했다.
스크랜턴은 효과가 없을 것이기에 돈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대신 집과 하수구를 청소하고 더러운 물이 침투하지 않도록 우물을 보수하는 일이라면 기부하겠다고 했다.
스크랜턴은 1887년 7월 선교보고에서 새 병원을 개설한 후
1년간 2000명이 넘는 환자를 진료했다.
그러면서 추가로 의료 선교사를 파송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어머니를 통해 해외여선교회에도 ‘여성 의사’를 보내줄 것을 부탁했다.
스크랜턴에게 선교는 미신과 무지, 관습, 인습과의 전쟁이었다. 대화와 설득이 중요했다. 스크랜턴은 어학공부에 더욱 매진했고 한국인들의 전통과 관습을 정확하게 알기 위해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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