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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지에 돌아와 감회사로 복직한 스크랜턴은 지방여행을 통해 희망을 읽었다. 한국은 기근과 질병, 전쟁으로 인해 정치 사회적으로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특히 러·일전쟁으로 북한 지방 교회들이 입은 피해도 적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도 복음전파 사역은 활기차게 진행됐고 토착 교인들의 신앙은 깊어졌다.
스크랜턴은 선교 역사 20년의 한국교회 현장을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교회’로 표현했다.
이런 가운데 선교 지역 확장과 그에 따른 사역 증가로 재정과 인력 보충은 시급한 문제였다.
“한국에 적어도 선교사 20명이 필요합니다.” 스크랜턴은 선교본부에 대폭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선교본부의 레너드 총무는 1904년 11월 ‘지원 불가’ 입장을 표명했다.
이러한 결정은 한국 선교 관리감독으로 선출된 해리스 감독의 의견 때문이었다. 그는 부임하기도 전에 한국의 선교사들과 협의하지도 않고 결정했다. 스크랜턴은 섭섭하고 아쉬웠다. 결국 현장에서 그 대책을 모색해야만 했다. 그것은 선교사를 도와, 혹은 선교사를 대신해 복음을 전하고 교인들을 지도할 토착 목회자 양성밖에 없었다.
스크랜턴은 구체적으로 사경회와 신학회를 연계하는 토착 목회자 양성 방안을 제시했다.
이는 선교사들이 태부족인 상황에서 토착인 사역자들로부터 지원과 협력을 얻어야 한다는 현실적인 고민에서 나온 것이기도 했지만 한국교회가 선교사의 관리를 받지 않고도 스스로 유지, 운영해나갈 수 있는 자립교회로서 위상을 정립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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