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728x90

한국사인물28

인촌 김성수 인촌 김성수는 이승만 정권 때 부통령을 했던 분이고요 1952년에 부산정치파동이 일어난후 부통령에서 자진 사퇴를 하였습니다 1919년 10월 경성방직을 설립하여 운영하였다. 경성방직은 초기에 경영 상황이 어려웠으나 1926년 이후 성장하였다. 김성수는 경성방직을 운영하며 물산장려운동에 참여하였고, 1920년에는 양기탁, 유근, 장덕수 등과 동아일보를 설립하였다. 1932년 오늘날 고려대학교의 전신인 보성전문학교를 인수하였다. 1930년대 김성수는 실력양성론에 따라 자치운동을 지지하였다. 8·15 광복 이후에는 한국민주당 조직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봉대운동 등에 참여한 뒤 김구, 조소앙 등과 함께 신탁통치반대운동을 주관하였다. 1947년부터 한국민주당의 당수를 지내기도 했고 1947년 3월부터 정부 수립 전.. 2018. 4. 8.
한명회 한명회는 조선 초기에 수양 대군이 세조로 등극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게 됩니다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그 때문에 과거에 번번이 실패해 38세가 되던 1452년에야 겨우 문음으로 경덕궁직이 되었다. 1456년 사육신 등의 단종 복위 운동을 사전에 적발하여 좌절시키고, 사육신과 관련자들의 처벌에 가담하였다. 세조의 최측근이자 책사로, 세조로부터 나의 장량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수양대군의 책사로 계유정난을 주도하여 수충위사협책정난공신(輸忠衛社協策靖難功臣)이 되고, 수양대군을 왕으로 즉위시키는 데 기여하여 동덕좌익공신(同德左翼功臣)이 되었다. 병조판서로 있으면서 여진족의 토벌과 북방의 수비를 견고하게 하는데 공을 세웠다. 1466년과 1469년~1471년, 1474년~1475년 세 번 의정부영의정을.. 2017. 10. 23.
김사미 김사미의 신상 김사미의 개인 신상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것이 없지만 사미(沙彌)라는 말이 하나의 단서가 된다. 사 미 출가하여 수행하는 불교수행자 사미는 출가하여 십계(十戒)를 받기는 했으나 아직 비구가 지켜야 할 구족계를 받지는 않은 남성 불교 수행자를 뜻한다. 김사미가 운문사에서 사미로 지낸 적이 있거나, 운문사 소유 땅을 소작하는 농민이자 일종의 재가 수행자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 밖에 김사미가 경주의 유력 가문 출신이지만 몰락하여 운문으로 피신했다는 설도 있다 2017. 6. 21.
허난설헌 조선후기의 유명한 작가인 허난설헌이 있습니다 허난설헌은 조선 중기의 시인, 작가, 화가,인데 호는 난설헌, 난설재이고, 자는 경번 본관은 양천. 이달에게 시와 학문을 배워 천재적인 시재(詩才)를 발휘하였고 1577년(선조 10년) 김성립과 결혼했으나 결혼 생활은 원만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시작으로 달래어 섬세한 필치와 독특한 감상을 노래했으며, 애상적 시풍의 특유의 시 세계를 이룩하였습니다.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여성 문인의 한사람이며, 300여 수의 시와 기타 산문, 수필 등을 남겼으며 213수 정도가 현재 전한느데 서예와 그림에도 능했고 남편 김성립과 시댁과의 불화와 자녀의 죽음과 유산 등 연이은 불행을 겪으면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습니다. 1608년(선조 41년) 남동생 허균이 .. 2017. 6. 4.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