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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조선219

시사단 정조 16년(1792) 국왕은 퇴계 선생의 덕을 추모하여 규장각 각신(閣臣) 이만수를 보내 도산서원에 지제케하고 그곳에서 과거시험을 치루어 영남 인재를 선발한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1796년(정조 20년) 그곳에 단을 모으고 비와 비각을 세웠다. 비문은 영의정인 채제공이 찬(撰)했다. 그 뒤 1824년(순조 24년) 개축(改築)한 바 있고, 1974년 안동댐 건설로 인해 지상 10m 높이의 단을 높이 쌓아, 옛 건물과 비를 그 위로 옮겼다 2016. 7. 2.
판소리 판소리는 우리나라 시대적 정서를 나타내는 전통예술로 삶의 희노애락을 해학적으로 음악과 어울려서 표현하며 청중도 참여한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며 판소리 다섯마당이 모두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 판소리 예능보유자 춘향가에 김여란, 김연수, 김소희(본명 김순옥:金順玉), 심청가에 정권진, 흥보가에 박녹주, 강도근, 수궁가에 정광수(본명 정용훈:丁榕薰), 박초월, 적벽가에 박동진, 박봉술, 한승호(본명 한갑주:韓甲珠) 춘향가에 오정숙, 심청가에 성창순, 조상현 추가로 인정된 자 춘향가에 성우향(본명:판례), 흥보가에 박송희(본명:정자), 적벽가에 송순섭 판소리는 서민들의 삶을 사실적으로 그려내어 피지배층의 삶의 현실을 생생하게 드러내고, 서민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면서 새로운 사회와 시대에 대한 희망을 표현하.. 2016. 6. 25.
기독교와 위정척사 운동 19세기에 들어 서구 기독교의 전래, 이것의 세력 확대에 따른 유교 신자들의 감소로 척사위정파는 크게 긴장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조선의 지배적 이념에 대한 일대 도전이었으며, 그것을 방치할 경우 체제의 뼈대가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는 기독교가 조선 사회와 성리학에 별다른 충격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에서 이전의 보호 정책을 개방 정책으로 전환시키게 된다. 개방이 초래할 그 영향에 대해 국가와 척사위정파는 인식을 달리 하고 있었다. 이항로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지식인들에 의한 실학과 동학의 태동, 기독교의 위협, 주기론의 유행, 지하에서도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양명학의 존재, 그리고 사회에 팽배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반영한 도참설 사상의 유포 등으로 성리학과 사회.. 2016. 6. 20.
매년 4만냥의 관세수입을 제공한 책문후시 중강후시는 숙종26년(1700년)에 폐지되었지만 그후 책문후시가 대성황을 이루었다. 청나라 요동의 봉화성(봉황성) 부근에 있던 책문에서는 이미 현종초부터 양국 사절이 왕래하는 기회에 후시가 열리고 있었는데 중강후시가 폐지된 이후 중강후시에서 활약하던 만상(灣商)과 송상(松商) 등이 명주, 모시, 인삼, 금은, 종이, 가죽 등을 가지고 가서 비단, 백사, 약재, 서적 등을 수입하였다. 정조11년(1787) 책문후시를 철폐하고 상인의 도강을 단속하도록 1787년에 결정하였으나 관세 수입의 증대를 위하여 8년 뒤에 다시 책문후시를 개설하였다. 책문후시는 매년 4~5회 열렸으며 연간 10만냥의 은이 책문후시를 통하여 청나라로 유출되었다. 이로써 매년 4만냥의 관세수입을 보장받게 되었고, 그 수입은 1876년 개.. 2016.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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