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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조선

매년 4만냥의 관세수입을 제공한 책문후시

by 산골지기 2016.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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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강후시는 숙종26년(1700년)에 폐지되었지만 그후 책문후시가 대성황을 이루었다.

청나라 요동의 봉화성(봉황성) 부근에 있던 책문에서는 이미 현종초부터 양국 사절이 왕래하는 기회에 후시가 열리고 있었는데 중강후시가 폐지된 이후 중강후시에서 활약하던 만상(灣商)과 송상(松商) 등이 명주, 모시, 인삼, 금은, 종이, 가죽 등을 가지고 가서 비단, 백사, 약재, 서적 등을 수입하였다.

 

정조11년(1787) 

 책문후시를 철폐하고 상인의 도강을 단속하도록 1787년에 결정하였으나  관세 수입의 증대를 위하여 8년 뒤에 다시 책문후시를 개설하였다.


책문후시는 매년 4~5회 열렸으며 연간 10만냥의 은이 책문후시를 통하여 청나라로 유출되었다.

  이로써 매년 4만냥의 관세수입을 보장받게 되었고, 그 수입은 1876년 개항까지 사행의 경비로 충당되었다.


당시 사상인들이 후시무역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여마제(餘馬制)와 연복제(延卜制)를 통하여 가능했다.

여마제는 사신의 일행이 압록강을 건너 책문에 이르는 도중에 세패나 방물을 실은 마필이 탈이 날 경우를 고려하여 의주부에서 짐을 실리지 않은 말 10여 필을 보내는 것이다.

이 말들은 사고가 없는 한 책문에서 돌아와야 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여마의 수가 증가하는가 하면 본래의 취지보다는 사상인들의 교역에 이용되어 많은 문제를 발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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