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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조선219

끝까지 길위에서 광해군 14년(1622), 어우(於于) 유몽인은 64세의 노구를 이끌고 금강산 유람에 나섰다. 강원 도사(江原都事)로 있던 32세 때 금강산을 노닌 이후 어언 30여 년 만이었다. 그 사이 어우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의 전화(戰火) 속에 분조(分朝)에서 광해군을 모시며 하삼도·함경도·평안도를 위무(慰撫)하는 어사(御使)로 나가기도 했고, 문안사(問安使) 등의 직책을 맡아 세 번 명나라에 다녀오기도 했다. 또 임란 때 호종한 공으로 공신에 책봉되기도 했으나, 59세에는 인목 대비(仁穆大妃) 폐비론에 가담하지 않은 일로 이이첨(李爾瞻)의 탄핵을 받아 퇴거하기도 했다. 그렇게 5년을 퇴거하던 그가 갑자기 금강산을 유람하겠다고 나서자, 주변에서 모두 손사래를 치며 말렸다. “노인에게 편안한 것은 이부자리이고 친근.. 2016. 7. 28.
도산서당 도산서당과 도산서원의 차이점을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도산서당은 이황이 지은 건물이고 도산서원은 이황 사후 지어진 건물로서 도산서당이 도산서원의 앞쪽에 있는 건물이다 시사단은 과거 특별시가 치루어지던 곳이다 2016. 7. 21.
남모를 노고 교정청에서의 노역이 머리 세게 하였네 天祿之役 令人頭白 천록지역 영인두백 - 안정복(安鼎福, 1712~1791)의 『순암집(順菴集)』 권13 「잡저(雜著) 상헌수필(橡軒隨筆) 하(下)」에 실린 「전배저술(前輩著述)」 중에서 해설 호학(好學)하였다는 공자의 애제자 안회(顔回)의 백발이나 하룻밤 편집으로 천자문을 펴낸 주흥사(周興嗣)의 백발에서 보이듯, 일반적으로 백발은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이자 상징으로 여긴다. 순암(順菴) 안정복(安鼎福)은 장년에 성호(星湖) 이익(李瀷)의 문인이 되어 수많은 서책을 더욱 섭렵하면서 『동사강목(東史綱目)』이라는 조선 후기의 대표적 사서(史書)를 남겼다. 그 외에도 평생을 학문에 정진하며 수십여 종의 저작을 남겼으니, 하나의 저술을 완성하기 위해 백발이 될 정도로 공들.. 2016. 7. 14.
한국고전-- 모기 모기가 돌아왔다. 처음에는 저것도 생명이니 좀 참고 같이 살아보자 했는데, 며칠 밤을 시달리고 나니 이러다 모기보다 내가 먼저 죽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터넷으로 ‘모기 퇴치법’을 검색해 봤다. 덕분에 놀라울 정도로 다양한 모기 퇴치법과 모기 퇴치 용품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만큼 모기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이 많다는 증거일 것이다. 기술이 발달한 지금도 이런데 조선 시대에는 오죽했을까? 가장 존귀한 지위에 있던 왕조차 ‘모기가 밉다’는 제목으로 시를 지을 정도였으니 당시 사람들이 느꼈을 괴로움을 알만하다. 모기는 좋아하려야 좋아할 수가 없는 생물이다. 밤새도록 쫓고 또 쫓아도 끊임없이 다시 귓가로 날아와 웽웽대며 잠을 설치게 한다. 피를 빤 자리에 독과 병균을 넣어 가렵게 하고 병들게 한다. .. 2016. 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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