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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조선

기독교와 위정척사 운동

by 산골지기 2016. 6.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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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들어 서구 기독교의 전래, 이것의 세력 확대에 따른 유교 신자들의 감소로 척사위정파는 크게 긴장하였다.

 

왜냐하면 그것은 조선의 지배적 이념에 대한 일대 도전이었으며, 그것을 방치할 경우 체제의 뼈대가 흔들릴 수 있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는 기독교가 조선 사회와 성리학에 별다른 충격을 주지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에서 이전의 보호 정책을 개방 정책으로 전환시키게 된다. 개방이 초래할 그 영향에 대해 국가와 척사위정파는 인식을 달리 하고 있었다.

 

 

 이항로

 

 

 권력으로부터  소외된 지식인들에 의한 실학과 동학의 태동,

 

 기독교의 위협, 주기론의 유행, 지하에서도 꾸준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던 양명학의 존재, 그리고 사회에 팽배한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반영한 도참설  사상의 유포 등으로

 

성리학과 사회의 안정성이 위협받는 상황을 신앙 체계의

 

 위기로 진단

 

최익현

 

  국가의 묵인 아래 외래 종교와 세속적인 문화가

 

유입되면서 성리학이 쇠퇴하는 대신 이교도와

 

背敎者가 늘어나고 있음을 언급

 

 

1866-1896년의 척사위정운동은 기독교의 유입 문제를 정치적 차원에서는 이념적 갈등으로, 사회적 차원에서는 성리학적 전통의 포기냐 아니면 기독교적 가치의 수용이냐는 이분법적 사고로 이해하였다.

 

또한 기독교가 거룩한 성리학 텍스트의 소멸 및 성리학적 전통에 대한 신념의 붕괴를 초래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때문에 척사위정운동은 성리학과 기독교의 만남과 관련하여 기독교의 권리도 인정하고 공존을 지향하려는 개화(방)파의 자세에 대해 아주 비판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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