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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조선

칠정산과 시헌력

by 산골지기 2022.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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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달력으로 칠정산과 시헌력이 있습니다.

칠정산
조선 세종 때에 이순지, 김담 등이 왕명에 따라 펴낸 역서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만든 역서
내편과 외편으로 구성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달력인 칠정산은 조선 세종 때에 이순지, 김담 등이 왕명에 따라 펴낸 역서입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달력 칠정산은 .

내편과 외편으로 되어 있는데, 중국 원나라의 역법과 명나라의 역법을 참고하여 우리나라의 실정에 맞게 꾸민 것입니다

세종은 고려 시대부터 왕립 천문기상대 역할을 하던 서운관의 이름을 관상감으로 바꾸고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간의대를 세워 별자리를 비롯하여

일출과 일몰, 일식과 월식, 혜성과 행성의 운행을 관찰토록 했습니다.

간의대는 조선시대의 천문대인데요  천체 관측기구인 간의(簡儀)를 올려 놓았다고 하여 간의대라고 했습니다.

조선은 고려의 제도를 계승하여 왕립(王立) 중앙천문기상대로서 서운관을 두었고 그 관측시설로 간의대를 설립하였습니다

서운관은 태복감·사천대·사천감·관후서 등으로 불리었습니다.

이후  1308년 고려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처음 설치되었고요  사천감과 태사국으로 분리되고 통합되기를 반복하다 1372년 병합하여 서운관이 되게 됩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관제를 그대로 이어 서운관으로 부르다가 세조때에  관상감으로 고쳤습니다.

서운관은 관측 시설로 개성에 첨성대를 두고 있었으며, 일식과 월식, 5행성의 움직임, 혜성과 유성의 출현 등을 관찰하였습니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이 관청은 주로 천문·재상·역일·추택 등의 일을 맡았다고 합니다.

서운관의 관측 시설로 간의대가 있습니다.

 천문현상을 관측했다는 기록은 실록에 남아 잘 남아 있습니다.

간의의 모습

 

 

서운관은 태복감·사천대·사천감·관후서 등으로 불리다가 1308년 고려 충선왕이 즉위하면서 처음 설치되었다. 그후 1356년(공민왕 5) 다시 사천감과 태사국으로 분리되고 통합되기를 반복하다 1372년 병합하여 서운관이란 이름으로 조선시대에 이어졌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의 관제를 그대로 이어 서운관으로 부르다가 1466년(세조 12)에 그 이름을 관상감으로 고쳤다. 서운관은 관측 시설로 개성에 첨성대를 두고 있었으며, 일식과 월식, 5행성의 움직임, 혜성과 유성의 출현 등을 관찰하여 상당한 양의 기록을 〈고려사〉 천문지에 남기고 있다. 〈태조실록〉에 의하면 이 관청은 주로 천문·재상·역일·추택 등의 일을 맡았다고 한다. 관측 시설로는 경복궁과 북부광화방에 간의대를 두어 많은 천문현상을 관측했으며, 그 기록들이 〈실록〉에 남아 있다.

 

서울 종로에 있는 관상감 관천대

 

간의대는  (元)의 곽수경(郭守敬)이 세운 거대한 관성대 이후 동양에서 가장 큰 규모를 갖춘 것이었습니다.

간의대는 세종대에 창설된 이후 여러번 개수 되면서

조선의 왕립 중앙천문대로서 동양 최대 규모와

최고 수준의 시설을 갖추었고  외국 사신들에게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천문학의 꽃은 천체의 운행과 위치를 살피고 예측하는 방법이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달력을 만드는 법이라고 할 수 있는데요

옛날에는 일식과 월식의 시간을 정확히 예측하는 것으로 달력을 만들었습니다.

우리 민족은 중국의 역법을 빌려서 사용했는데

중국의 위치에서 계산한 것이기 때문에 위도와 경도의 차이로 빚어지는

여러 가지 오차를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극복하고 우리의 실정에 맞게 만든 달력이 칠정산입니다.

칠정산 내편

아담 샬이 만든 달력인 시헌력

시헌력은 청나라 초기에 베이징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 만든 달력입니다.

시헌력을 만든 아담샬

서양식 역법인 시헌력은 이후 김육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도입이 되게 됩니다.

시헌력
청나라 초기에 베이징에서 활동한 예수회 선교사 아담 샬이 만든 달력

청나라에서 활약하던 예수회 선교사인 아담 샬은 청에 억류되었던 소현 세자와 가깝게 지냈습니다.

서양식 역법인 시헌력
김육에 의하여 우리나라에 도입

 때문에 소현 세자가 청나라에서 조선으로 귀국할 때 서양의 과학기구와

서학 서적들을 많이 가지고 왔습니다.

시헌력을 도입한 김육

인조 때 김육은 시헌력을 도입하자고 주장하였는데요

김육의 주장은 인조때에는 실현되지 않았지만 이후 효종 때 시헌력 시행을 결정하게 됩니다.

시헌력
인조 때 김육은 시헌력을 도입하자고 주장
 효종 때 시헌력 시행을 결정

조선 정부는 여러 차례 천문관을 중국에 파견하여

시헌력과 천문학에 관한 서적과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노력하였습니다.

시헌력의 도입으로 서양식 과 시간 측정법이 새롭게 시행이 되게 됩니다.

허원
시헌력을 도입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중국을 다녀 온 인물
중국의 천문 기관에 관한 책인 의상지를 간행

시헌력을 도입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중국을 다녀 온 인물로 허원이 있는데요

허원은 중국의 천문 기관에 관한 책인 의상지를 간행하기도 했습니다.

청나라의 달력은 중화민국이 수립이 되면서 없어졌는데요 

중화민국을 세운 뒤, 1912년 1월 1일부터 그레고리력을 도입하고 시헌력을 폐지하였습니다.

이후 시헌력은 전통명절의 계산에만 일부 남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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