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릉은 조선 9대 성종과 왕비 정현왕후 윤씨의 능이다. 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한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의 형태이다. 정자각 앞에서 바라보았을 때 왼쪽 언덕(서쪽)이 성종, 오른쪽 언덕(동쪽)이 정현왕후의 능이다.
진입 및 제향공간에는 홍살문, 판위, 향로와 어로, 정자각, 수복방, 수라간, 비각이 배치되어 있다. 성종의 능침은 『국조오례의』의 예를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정현왕후의 능침은 병풍석만 생략하였을 뿐 성종의 능침과 같은 형태이다.
난간 석주의 윗부분에는 초기 난간석의 부드러운 맛이 그대로 남아 있고, 문무석인은 윤곽과 조각이 섬세하고 아름답다.
1494년(성종 25)에 성종이 세상을 떠나자 이듬해인 1495년에 광주 학당리(현 선릉)에 능을 먼저 조성하였다. 원래 이 자리는 세종의 아들인 광평대군묘역이 있던 자리였으나, 선릉이 조성되면서 광평대군묘역은 현재 강남구 수서동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1530년(중종 25)에 성종의 왕비 정현왕후 윤씨가 세상을 떠나자 선릉 동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였다. 선릉은 유독 수난을 많이 겪었다.
그 첫 수난은 임진왜란이 한창이던 1593년(선조 26)에 일어났다. 『선조실록』 1593년 4월 13일자의 기사에는 “왜적이 선릉과 정릉을 파헤쳐 재앙이 재궁에까지 미쳤으니 신하로서 차마 말할 수 없이 애통합니다.”라는 경기좌도관찰사 성영의 치계와 “이 서장을 보니 몹시 망극하다.
속히 해조로 하여금 의논하여 조치하게 하라.”는 선조의 명이 기록되어 있다. 1625년(인조 3)에는 정자각에 불이 나고, 그 다음해에는 능침에도 불이 났다.
성종(成宗) 이야기
성종(재세 : 1457년 음력 7월 30일 ~ 1494년 음력 12월 24일, 재위 : 1469년 음력 11월 28일 ~ 1494년 음력 12월 24일)은 추존 덕종(의경세자)과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의 둘째 아들로 1457년(세조 3)에 경복궁에서 태어났다.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아버지 의경세자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할아버지인 세조가 잠시 궁중에서 키웠는데, 성품이 돈후하고 서예와 서화에도 능하여 세조의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1461년(세조 7)에 자산군에 봉해졌고, 숙부 예종이 1469년(예종 1)에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인 정희왕후 윤씨의 명으로 예종의 양자로 입적되어 13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즉위 후 정희왕후 윤씨의 수렴청정을 7년 동안 받았으며, 1476년(성종 7)에 친정(親政)을 시작하였다.
성종은 법령을 정리하여 세조대에 부터 편찬해오던 『경국대전』을 1485년(성종 16)에 반포하였고, 1492년(성종 23)에는 『대전속록』을 완성하여 유교적 통치의 전거가 되는 법제를 완비했다.
세조 측근 공신을 중심으로 하는 훈구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신진 사림세력을 등용하여 훈신과 사림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게 함으로써 왕권을 안정시키고, 조선 중기 이후 사림정치의 기반을 조성하는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