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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조선

임진왜란 의병

by 산골지기 2016. 9.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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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병의 신분은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는 전계층이었는데,

농민이 주력군이었고 의병장은 대개 전직관료·유학자들이었다.

 

 

의병은 향촌공동체를 바탕으로 자신의 지역을 지키기 위해 봉기한 부대였다. 따라서 향토지리에 익숙하고 지리에 알맞는 무기와 전술을 사용함으로써 적은 병력으로 대군과 적대하는 정면충돌보다는 매복·기습·위장 등과 같은 유격전술을 사용하여 일본군에게 큰 피해를 주었다.

 

의병은 우선 점령당한 하삼도 지역에서 일어났는데, 경상도의 경우 ·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권응수(權應洙) 등이 활약했다.

특히 현풍 유생 곽재우는 사재를 털어 의령에서 기병하여 낙동강을 오르내리며 의령·삼가·합천·창녕 등을 수복하는 등 경상우도를 보호하여 홍의장군(紅衣將軍)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전라도의 경우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김덕령(金德齡)·유팽로(兪彭老) 등이 활약했다. 특히  유팽로와 함께 고경명은 담양에서 회맹하여 의병대장으로 추대되었고, 7월 9일 금산에서 일본군과 격전 도중 장렬하게 전사했다.

충청도의 조헌은 10여 명의 유생들과 합의하여 공주·청주 간을 왕래하며 의병을 모집, 옥천에서 기병했다.

 

이들은 차령에서 일본군을 격퇴하고 온양·정산·홍주·회덕 등에서 병력을 보충한 다음 영규(靈圭)가 이끄는 승병 500여 명과 합동하여 8월 1일 청주성을 수복했다. 그러나 금산의 일본군을 공격하다가 8월 19일 700명 전원이 전사했다.

경기도에서는 홍계남(洪季男)·우성전(禹性傳) 등이

 활약했는데,

홍계남은 양성·안성 및 충청도의 읍들을 보호했다.

황해도는 전(前) 연안부사 이정암(李廷馣)이 기병하여 연안성을 굳게 사수함으로써 호남과 호서의 해상교통이 의주까지 가능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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