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랑은 선도(仙徒)이다. 우리나라에서 신궁(神宮)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大祭)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燕)의 동산에서, 노(魯)의 태산에서 한 것과 같다. 옛날 연부인(燕夫人)이 선도(仙徒)를 좋아하여 많은 미인을 길렀는데 이름 하기를 국화(國花)라 하였다.
그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로써 원화를 삼게 되었다. 지소태후가 이것(원화)을 폐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받들게 하였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위화랑을 사랑하여 이름을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서 비롯하였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을 받드는 것(奉神)을 위주로 하였는데, 국공(國公)들이 이것(봉신)을 베풀어 행한 후에(또는 국공들이 무리(화랑도)에 들어간 후에) 선도는 도의를 서로 힘썼다.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났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이 이로부터 나왔다.
(이에)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화랑세기 서문 기록)
신라의 화랑도가 선도(仙徒)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신라의 선도는 옛날 연부인이 거느렸다는 선도와 연결시킬 수 있다. 그러한 풍습이 동쪽으로 흘러 들어 신라에서도 여자를 원화로 삼았다는 사실이 주목하게 된다. 신라 선도의 풍습은 서쪽에서 온 것이다.
한편 선도는 신궁을 받들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옛날에 선도는 봉신을 위주로 하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 받드는 일을
주로 하였는데, 국공들이 화랑도에 들어간 후
선도는 도의를 서로 힘썼다고 한다.
『삼국사기』 에 따르면 소지왕(비처왕) 9년(487) 또는 지증왕 때 시조가 탄생한 나을에 신궁을 설치한 것으로 나오고 있다. 그런데 『화랑세기』를 보면 신궁의 설치시기는 그 이전일 수밖에 없다.
5세 풍월주 사다함 조의 세계(世系)에는 눌지왕이 심황을 명하여 내물신궁의 주로 삼았다는 사실이 나오고 있다.
눌지왕 대(417-458)에 신궁이 존재하였던 것이 확인된다. 여기서 신궁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를 지내던 선도의 기원을 새롭게 찾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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