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동교회
1885년에 조선 입국한 스크랜턴은 정동교회 근처에 정동감리교병원을 세우고 가난한 환자들을 무료로 치료하다가, 의료사업을 확장하기로 하고 남대문 근처인 지금의 상동교회 자리를 구입하여 약국과 병원을 차려 의료선교와 복음선교를 겸함으로써 오늘의 상동교회가 시작되었다.
1893년 이 병원교회가 정식으로 구역회로 승격되어 스크랜턴이 담임목사로 임명되었고, 1895년 정동병원을 상동병원으로 통합하여 상동교회 자리는 전적으로 병원으로 사용하였다.
정동교회
창설자 아펜젤러는 1885년 4월 5일에 입국하여 그 해 8월 3일에 배재학당(培材學堂)을 세워 한국의 근대교육을 창시하고, 또한 이를 보급하는 데 결정적 구실을 하였다.
아펜젤러는 학교에서 학생들을 상대로 종교행사를 하였으나, 1887년 9월 전적으로 예배만을 볼 수 있는 교회용 건물을 구입해 이를 수리하고 교회이름을 베델예배당(Bethel Chapel)이라 하였다.
정동제일교회는 초창기부터 그 옆에 배재학당과 이화학당(梨花學堂)이 있어 학생들이 그 교회의 중요 회원이 되어 개화운동의 한 중심지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 교회의 담임목사가 배재학당장까지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교회청년회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정동교회]
3·1운동 이후에는 주로 문화운동과 무산대중을 위한 야간학교 개설 등을 통한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1930년에는 남북감리교회를 하나로 통합해
하나의 민족교회인 조선감리교회 창설에
교회직원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1933년에는 김인영(金仁泳) 목사와 신흥우 등이 서울의 일부 장로교 지도자들과 손잡고 신앙단운동을 전개하였다.
일제 말기의 억압과 역경을 잘 극복한 정동교회는 광복과 함께 감리교단의 분열에 휘말렸으나, 평신도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화해를 강조한 끝에 드디어 1949년에 재건파·부흥파의 합동총회를 개최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6·25전쟁 당시 폭격으로 예배당 강대 쪽이 폭파되면서 파이프오르간이 파괴되었다.
1976년에 문화공보부가 19세기 건축물인
정동교회 붉은 벽돌 예배당을
사적 제256호로 지정함에 따라
이 건물을 헐고 새로 지을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선교100주년 기념예배당은 이 문화재 예배당을 비켜서 그 뒤에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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