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고려140 고려 전기의 제도 사심관 제도는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을 신라의 옛 도읍 경주의 사심관에 임명한 데서 비롯하여, 공신이나 고관들을 자기 고향의 사심관으로 삼아 부호장 이하의 향리직을 임명할 수 있도록 하고 그 지방의 치안을 책임지게 하였다.이것은 모두 중앙 집권 정책의 일환이었다. 이 러한 기인 제도와 사심관 제도로 말미암아 호족의자제가 중앙 관리화하고 지방 호족도 중앙 정부의간접적인 통제를 받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 호족세력을 회유·통제하기 위하여 실시한 제도였다. 956년(광종 7년)에 시행된 법으로, 노비의 신분을 조사하여 원래 양민이었던 자로서 노비가 된자들을 풀어 양민으로 삼고자 한 법이다. 이는 광종이 호족 세력을 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실시한 것이다. 당시 호족 출신 공신들은 후삼국의 혼란기.. 2015. 9. 21. 고려 종교 무신 집권기에 고려 중기 불교계의 보수화와 폐단에 대한 반발로 불교를 정화하려는 결사 운동이일어났다. 수선사의 정혜 결사와 백련사의 백련결사가 가장 대표적이다.12세기 말에 무신 정권이 들어서자 문신과 결탁하였던 교종 세력은 무신 정권에 저항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선종 계통 승려들이 결사 운동으로불교 개혁 운동을 주도하였다. 무신 정권은 이러한 불교 개혁 운동을 지원하여 선종을 중심으로불교 교단을 재편하려고 하였다. 무신 정권은 정혜 결사가 조직되자 1204년 수선사라는 사액을 내리고 적극적으로 지원하였다. 수선사 정혜 결사 운동을 주도한 인물은 보조국사지눌이었다. 지눌은 정혜 결사문에서 불자들의 타락한 모습을 비판하고, 산림에 은둔하며 선정(禪定)을 익히고 지혜를 닦기에 힘쓸 것을 주장하였다. 균여의.. 2015. 9. 21. 몽골과 고려 12세기 초, 완옌부의 추장 우야소는 고려에 복속되어 있던 여진 부락을 침략·점령하며 정주의 천리장성 부근까지 남하하였다. 이를 묵과할 수없었던 고려는 여진 토벌에 나섰다. 처음 고려는 문하시랑평장사 임간을 보냈으나 실패하였다(1104). 다시 추밀원사 윤관을 동북면행영병마도통으로 삼아 대전하게 하였으나 또 패배하였다.여진은 기병인데 비해 고려군은 보병이었기 때문이었다. 윤관은 임금에게 패전의 원인을 아뢰고, 별무반이라는 새로운 군사 조직을 편성하여 후일을 기약하였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神騎軍),보병인 신보군(神步軍), 그리고 승병으로 조직한 항마군(降魔軍)으로 이루어진 특별 부대로, 양반과백정 농민이 주축을 이루었고, 승려와 상인, 노비까지도 동원된 거족적인 군사 조직이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11.. 2015. 9. 21. 고려말... 국력이 쇠퇴하다 신돈의 개혁 정치가 실패한 것은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세력 기반을 갖지 못한 점과 개혁으로 말미암아 자기 이익이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 한 권문세족의 반발 때문이었다. 고려 말 신돈이 이루지 못했던 개혁은 이후 새롭게 성장하고 있었던 신진 사대부 세력에 의해 수행되어 조선 왕조의 건국으로 이어졌다. 고려말에 국력이 쇠퇴하고 혼란 상황이 이어가면서 왜구의 침략이 매우 격심하였다. 왜구는 고려말엽인 1350년 무렵부터 대규모로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왜구는 소규모 병력으로 봄과 여름에, 주로 일본에서 가까운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 지역을 침입하였다. 그때가 중앙 정부에 세금을 내기 위해 창고에 모아 둔 쌀을 개경으로 운반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쌀을 운반하던 조운선과 창고를 습격하던 왜구에 고려 .. 2015. 9. 17. 이전 1 ··· 30 31 32 33 34 35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