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돈의 개혁 정치가 실패한 것은 개혁을 추진할 수 있는 세력 기반을 갖지 못한 점과 개혁으로 말미암아 자기 이익이 줄어드는 것을 두려워 한 권문세족의 반발 때문이었다. 고려 말 신돈이 이루지 못했던 개혁은 이후 새롭게 성장하고 있었던 신진 사대부 세력에 의해 수행되어 조선 왕조의 건국으로 이어졌다.
고려말에 국력이 쇠퇴하고 혼란 상황이 이어가면서 왜구의 침략이 매우 격심하였다.
왜구는 고려말엽인 1350년 무렵부터
대규모로 고려를 침략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왜구는 소규모 병력으로 봄과 여름에, 주로 일본에서 가까운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 지역을 침입하였다.
그때가 중앙 정부에 세금을 내기 위해 창고에 모아 둔 쌀을 개경으로 운반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쌀을 운반하던 조운선과 창고를 습격하던 왜구에 고려 정부가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자, 그들은 차츰 대담해졌다. 때로 400~500척이나 되는 배를 동원하여 조운선을 호송하는 병선을 직접 공격하기도 하였다.
또, 해안 지역뿐만 아니라 내륙까지 들어가 관청을 공격하고 불을 질러 행정을 마비시켰으며 심지어는 병영까지 공격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은 일반 백성들이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왜구에게 죽음을 당하거나 끌려가 노예가 되었다. 많을 때는 한 번에 1000명이 넘는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기도 하였다. 약탈을 피해 뿔뿔이 흩어진 농민들은 비옥한 농토를 버리고 산성이나 내륙 지역으로 쫓겨 갔다.
고려 정부가 왜구를 막아 내지 못하는 사이 백성들의 정부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면서, 정부의 징발과 규제를 피해 도망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또 왜구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해안가에서 가까운 도읍을 내륙으로 옮기자는 주장도 대두가 되었다. 왜구의 침략이 극심한 상황에서 어떤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왜구에 협력하여 간첩 노릇을 하기도 하였다. 심지어 정부에 불만을 품고 왜구의 침략을 틈타 왜구를 가장하기도 하였는데, 이를 가왜라고 하였다.